비밀에 가득 쌓인 약혼녀,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연인, 과거를 지우고 타인이 되고자 했던 누군가라는 설정만 들어도 웬만한 스릴러 한 편이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평범한 소재와 설정이지만, 그것을 누가 이야기로 만드느냐에 따라 작품은 완전히 색채를 달리한다. 판타지와 미스터리에 세련된 연애 소설 느낌마저 가지고 있는 기욤 뮈소라면 어떨까. 아마 당신의 오늘 밤은 이 책에게 시간을 고스란히 내주어야 할 것이다.
갑자기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소설을 쓰다 보면 간혹 등장인물이 작가를 기습하는 순간들이 있다.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매우 좋은 글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의도하고 쓴 글이 아닌 만큼 당장 지워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야기 전개상황에서 매끄러운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문장이었다. 작가인 나에게는 간혹 발생하는 돌발 상황으로 그때마다 매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작가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든 셈이니 정말이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라파엘과 소아과 의사인 안나는 결혼을 3주 앞두고 있다. 그들은 앙티브의 코트다쥐르 해안에서 늦여름의 마지막 햇빛을 만끽하며 둘이서 오붓한 주말을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과 라파엘의 아들 테오, 그렇게 세 사람만 하객으로 참석하는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라파엘은 곧 부부가 될 사이에서 비밀은 없었으면 한다고, 아직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면 시원하게 털어놓으라고 말을 건넨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난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라고 하며 그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있을까?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지나간 과거를 들쑤셔 상처를 헤집어놓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럼에도 라파엘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각오가 되어 있다며, 무슨 이야기를 듣는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며 그녀에게 비밀을 얘기할 것을 종용하고, 마침내 안나는 태블릿pc를 꺼내 사진 한 장을 그에게 보여준다. "내가 저지른 짓이야"라고 말하며. 끔찍한 사진에 너무도 놀란 그는 충격을 받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방을 집어 들고 펜션을 나와 버렸고, 그 후로 안나는 종적을 감 춘 채 사라져 버린다. 뒤늦게 라파엘이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며 그녀를 찾지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라파엘은 같은 건물에 살면서부터 친분을 다져왔던 전직 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의 과거로부터 자취를 찾아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안나의 집부터 수색하기 시작한 그들은 그곳에서 40만 유로나 되는 지폐더미가 담긴 가방과 위조된 신분증 두 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본명이 클레어 칼라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게다가 클레어 칼라일은 희대의 사이코패스로 알려진 하인츠 키퍼에게 희생된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대체 라파엘의 약혼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그녀의 정체는 뭘까.
"아이를 임신 중이라고 했지? 엄마가 되면 당신도 알게 될 거야. 세상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지. 부모가 되면 훨씬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무한히 약한 존재가 되기도 해. 자식을 잃은 슬픔과 좌절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야. 평생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고통이 주어지니까. 당신은 오늘이 평생 최악의 날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최악은 미래형이야. 내게 있어서 최악은 루이즈와의 추억이야. 어느 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깨어나 딸아이의 목소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루이즈의 눈빛,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던 습관, 머릿속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된 거야."
벌써 국내에서 출간되는 기욤 뮈소의 작품이 열세 번째인데, 어쩌다 보니 그 동안 그의 작품들을 모두 읽었다. 재미있는 건 항상 전작과 비슷비슷한 느낌인데, 매번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되고, 꼭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선 매번 소설 속 인물이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 나오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열 개의 알약이 존재한다거나, 현실에서 만난 두 남녀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살고 있었다거나, 타인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거나 판타지적인 요소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호기심을 자아내곤 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게 비현실적인 소재를 너무도 현실적인 인물들의 일상과 엮어 놓는 실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있을 법하다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갈수록 그의 작품들이 '스릴러' 형식에 치중하고 있어 더욱 반가운데, 이번 작품으로 본격 스릴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는 프랑스 현지의 평을 이끌어내었다고 한다. 스릴러화 될수록 판타지적인 부분보다는 현실적인 사건들을 그리고 있어 더욱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의 주인공이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아빠인데다,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들이 모두 아이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어 부모의 입장에서 읽기에도 더욱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막판의 반전 또한 기욤 뮈소 작품의 백미인데,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설정과 상황들을 결국은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고, 인물들을 현실의 땅에 발 붙이도록 해주는 것 또한 바로 이 반전의 역할이다. 반전의 역할이 깜짝 쇼가 아니라, 납득과 안도를 주는 장치라고나 할까. 기욤 뮈소의 작품을 그 동안 꾸준히 읽어왔던 독자들이라면 이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알 것이다. 그가 워낙 작품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묘한 능력을 가진 작가라 작품 속에서 반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