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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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던, 예순세 살의 브릿마리는 지금 고용 센터의 어느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녀가 일을 하려는 이유는, 자신이 죽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 주길 바라기 때문이란다.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직업도 없다면, 죽은 지 몇 주 만에 발견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일을 하면 출근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알아차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40년 동안 살림만 하며, 평생 살던 동네를 벗어난 적 없었던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아가씨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그래서.........일을 하시려는 이유가........그러니까.............."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브릿마리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한숨을 쉰다.

"그 여자는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직업도 없었어요. 그런 여자가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요. 일을 하면 출근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알아차릴 거 아니에요."

어느 날 남편이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일로 인해 내연의 여자가 브릿마리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여자 향수가 배인 그의 셔츠를 빨아가며 1년 내내 모른 척 했던 진실과 대면하게 된 그녀는 더 이상 그와 함께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혼자 지내다 죽어서야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 악취로 이웃 주민들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을 하려고 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거든요."

고용 센터의 여직원은 특별한 능력도, 경력도 없는데다 나이까지 많은 할머니의 우격다짐이 난감하기 그지 없었지만, 우연찮게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일자리를 주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브릿마리는 얼마 후에 폐쇄될 작고 외진 동네, 보르그로 차를 몰고 떠나게 된다. 그곳은 문을 닫은 축구장과 문을 닫은 학교와 문을 닫은 약국과 문을 닫은 주류 판매점과 문을 닫은 보건소와 문을 닫은 슈퍼마켓과 문을 닫은 쇼핑센터가 있는 동네였다. 유일하게 레크리에이션 센터는 문을 닫지 않았지만, 제대로 닫을 시간이 없어서 남겨졌을 뿐 곧 같은 운명에 처해질 곳이긴 했다. 겨우 3주 동안 일할 수 있는 그곳은 외딴 곳에 있었고 보수도 워낙 형편없었지만, 브릿마리 입장에서야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40년 동안 언제나 팩신과 과탄산소다로 집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살아왔던 그녀에게, 마치 쓰레기 처리장과도 같은 지저분한 그곳이 어떻게 느껴졌을 지는 안 봐도 훤할 것이다. 그렇게 평생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던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쓰레기 천지인데 내가 여기서 일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브릿마리 씨?"

"뭔데요?"

"우리 어머니가 평생 사회복지 쪽에서 일을 하셨거든요. 그 쓰레기들 한복판에서, 그게 가장 두툼하게 쌓인 곳에서 눈부신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게 보람을 갖게 된다고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그 다음 문장을 전한다.

"브릿마리 씨가 저의 눈부신 이야기예요."

자신의 아이를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집을 지키며 남편의 아이들을 건사했고,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에도 자신의 인생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집을 번듯하게 가꾸고 남편을 내조했고, 친구를 사귀지 않고 집안 일에만 신경 쓰는 그녀에게 남편은 사회성이 떨어진다며 자신이 두 사람 몫의 사회생활을 하겠다고 그녀에게 몇 년 더 집을 지키라고 했고, 그 몇 년이 십 수 년이 되었고, 십 수 년이 평생이 되었다. 브릿마리에게도 처음 부터 아무런 기대도, 꿈도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것들의 유통기한이 지났을 뿐. 그런데 어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 그녀 혼자 뿐일까. 나는 브릿마리를 보며 대한 민국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며 모든 시간과 노력과 삶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성인이 된 아이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되며 부모님을 찾는 걸 멀리하고, 평생 자신에 대한 남들의 평가보다 남편에 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더 따져가며, 남편의 내조를 해왔지만, 정작 남편은 그녀가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순간에 기분이 나빠지는지, 언제 상처받고, 언제 외로운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면 남은 세월보다 지난 세월이 더 많은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어 버린다.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베라는 남자>에 등장했던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했던 쉰 아홉의 까칠한 오베를 기억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삿대질을 하고, 다그치고, 노려보는 남자. 평생 자명종 없이 6 15분 전에 눈을 떴고, 40년 가까이 매일 아침마다 정확히 똑같은 양의 커피를 내려 마시고, 항상 동네 시찰을 하러 거리로 나가는 남자.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해대고, 툭하면 욕설을 내뱉는 남자. 하지만 매 순간 세상 전부와 싸우고 있는 듯한 그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종일 그녀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노인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엘사는 일곱 살 이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다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해,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왕따, 선생님들에게는 눈엣가시이며, 주변 어른들에게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독특한 존재였다. 애 어른 같은 엘사에게 당연히 친구도 없고 말상대라고 해 봤자 병원 운영으로 너무 바쁜 엄마를 제외하고 할머니뿐이었다. 그리고 프레드릭 배크만의 세 번째 작품 <브릿마리 여기있다>에 등장하는 예순 셋 브릿마리 역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캐릭터이다. 오베가 세상에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그저 옳은 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것처럼, 브릿마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해야 할 일, 약속 시간 등을 자신의 리스트에 적어 정리하고, 그 리스트에 있는 일들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반드시 실행하려고 한다. 이들은 세상을 흑과 백으로 구분해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일로 명확하게 구분해 행동하는 덕분에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도, 당황스럽게도 만들지만 사실 뭐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사라는 게 다 비슷한 거긴 하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더라도, 그걸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다면,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질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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