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다. 내리막길 커브가 연속으로 있는 도로를 상당한 속도로 들이박은 것 같다는 사고 경위를 전해 듣는 여자는 남편이 대체 어디서 돌아오는 길이었을지 의아하다. 머리를 다쳐서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은 낮다고 하니, 아마도 남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 의심이 되는 것은 그 방향이었다면 남편의 옛날 애인이 사는 곳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옛날 애인은 바로 여자의 엄마였다.

"가집을 내라고 한 것도 그 사람이에요. 한번 제대로 자기가 쓴 글과 동반자살을 해보라며."

"동반자살이라니, 그것도 넘치게 문학적이네."

...........세쓰코는 남편이 사용한 동반자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이대로 계속 같은 노선으로 단가를 쓰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세쓰코 자신이 아프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세쓰코보다 기이치로 쪽이 더 열심히 단가를 선별하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 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여자, 게다가 그녀는 남편이 의식 불명으로 병원에 실려 있는 동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 라고 하면 무슨 막장 드라마냐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는 동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이야기 탓도 있겠지만, 생각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담담한 일상과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사연들이 전혀 선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롯만 보면 막장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러브 호텔을 배경으로 젊은 나이에 연배가 있는 남자의 세 번째 아내가 되면서도 결코 그를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여주인공이라니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청혼을 받아 들었을 때, 극중 세쓰코 처럼 반응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남자는 오랜 세월 엄마의 애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담담한 결혼 생활이 평범하게 이어지다,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남편의 교통 사고 이후 그녀의 삶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돈으로 유혹 받아 돈으로 맺어진 부부의 관계, 게다가 그녀는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는 감정 조차 누릴 수가 없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살면서 좀처럼 '감정'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자. 세쓰코는 단가를 쓰면서 자신의 내면을 글로만 투영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성애와 허무를 기둥으로 하는 그녀의 작품이 매우 도발적이고 적나라한데 비해, 그녀의 평소 말투와 행동은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가정 폭력에 시달려온 어린 소녀라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던 과거가 있었으니 말이다.

미치코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품위 있게 웃었다. 마유미도 역시 엄마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세쓰코는 미치코의 천진난만함보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소녀가 보이는 엄마와 똑같은 미소에 무서움을 느꼈다.

세쓰코는 자신도 어린 시절 리쓰코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은 엄마를 닮으며 자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같은 생물을 낳은 여자가 얼마쯤은 후회하게 하기 위해.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굽이치는 달> <호텔 로열>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만난다. 어린 시절 실제로 러브호텔을 하던 부모의 딸이었던 사쿠라기 시노는 열다섯 소녀였던 시절부터 학교에서 돌아와 호텔에서 청소를 했었다. 더러운 시트를 갈고, 욕실 청소를 하고, 손님들이 사용한 콘돔을 버리고 새것을 구비해놓는 등 부모의 일을 도우며 그녀는 러브호텔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을 마주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절실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우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불행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이어지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어둡지만은 안다는 것 또한 그녀의 작품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삶에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것 같다고 할까.

사쿠라기 시노를 '신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 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이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치정이 얽혀있고, 막장스럽고, 러브 호텔이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치열한 애증과 욕망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간 원초적인 욕망을 마주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순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가식과 허례허식에 둘러 쌓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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