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그라운드
S.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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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뉴스에서 지구 멸망의 날을 대비한 '초호화 지하 벙커 시설'이 화제라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무려 100억원대 규모의 이 건축물은 핵전쟁, 자연 재해 등 인류 멸망 상황을 대비한 지하 벙커 시설로 약 200명의 인원이 함께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용 거주 공간은 침실 및 거실 욕실 주방 시설이 있는 아파트먼트 형태로 설계되었고, 자체 공기 정화 시스템 및 의료 시설, 발전기, 컴퓨터가 비치된 사무실 등이 있어 장시간 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공간처럼 보였다.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지하 14층 아파트도 있었는데, 역시나 비상 발전 시설과 최첨단 보안 장치까지 갖추었고, 밖에 나가지 않고 취미 생활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최고 32억원의 비싼 가격에도 금새 동이 났다고 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초호화 지하 벙커 '성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하 14층 아파트를 모델로 이야기를 구상했으리라. 극중 등장하는 벙커는 8층짜리이지만, 구조와 기능이 거의 흡사하니 말이다.

고급 아파트를 지하에 파묻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정말로 그런 거니까.

더 자세히.

알았어...........밖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해치 입구만 있는데 꼭 금고 문처럼 생겼어(시시해). 그리고 풍력발전용 터빈이 있고 창문 대신 LED화면이 있어(시시해). 잠수함 문짝 같은 문이랑(완전 시시해), 생체 인식 잠금 장치랑(이건 근사하고). 고급스러운 장식처럼 꾸며놨지......진짜 편집광적인 보안 장치야. 누가 여길 부수고 들어온다고 그러는지. 문명으로부터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이거든. 여긴 메인 주 한복판이야. 숲하고 들판밖에 없어. 무슨 중간계나 그런 데 와 있는 것 같아.

 

, 여기 질병, 지진, 핵폭발 등 어떤 재앙이 일어나도 안전한 지하 벙커가 등장한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모습을 보고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누구도 초호화 지하 벙커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을 말하지는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욕망의 화신이고, 배려보다는 개인주의를 지향하며,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존재들이니, 애초에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들간의 불화야 어느 정도 예상된 바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실제 존재하는 지하 벙커의 설계도와 시설이다.

아래 수영장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그곳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미국까지 빠르게 퍼지자, 일부 상류층 사람들은 초호화 생종형 지하 벙커인 성소로 몰려든다. 그들은 거액으로 성소의 주거권을 구매했기에, 함께 이동할 가족 외에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가족과 함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황야에 위치한 그곳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선 그들의 거취를 알 수 없게 된다. 과연 이것은 그들에게 안전일까. 위협일까.

 

이야기는 6명의 등장인물 각자의 시점에서 교차되어 진행된다. 게임에 미쳐있는 한국인 소년 재이, 종교를 맹신하는 부모를 둔 소녀 지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얼결에 성소에 오게된 베이비시터 케이트, 편집광에 독설가인 아내를 애증하는 제임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인 전직 발레리나 트루니, 그리고 성소의 설계와 건설에 참여했던 프로젝트 매니저 윌이다. 8층짜리 지하 벙커에는 2층부터 5층까지 총 다섯 가족이 입실을 했고, 그 외에는 성소에 투자하고, 설립한 담당자 그레그가, 나머지 하나는 아픈 아내를 두고 그레그의 부탁으로 잠시 점검 차 들른 윌이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의료실과 수영장, 체육실, 냉장고 저장실, 정수시설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망각의 영혼 때문에 공기가 더 탁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삭막한 공허함이 남았다....시체들은 쌓여만 가고, 이제는 지금 이게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 판단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이것은 한 편의 발레일지도 모른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햄릿>이나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처럼,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주지육림에서 무용수들은 몸부림치며 뛰어다니다가 결국 추락하고, 페인트가 튄 타이즈와 가는 팔다리의 집합체가 되어 흡족하게 쌓여가는. 그러나 머리가 깨진 소년에게는 어떠한 흡족함도 없고, 실수로 마지막 숨을 놓친 늙은 여자에게는 어떠한 미학적 아름다움도 없다.

 

각자의 개성과 집안 사정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갑자기 함께 살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여기저기 삐걱대는 불협화음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어찌되었든 이곳은 위험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들 여기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성소의 잠긴 문을 열 수 없게 되고, 음식과 물마저 오염되며,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벌어지는 살인 사건들. 이제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비단 바깥에 있는 바이러스 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성소는 결코 안전하지 못한 장소로 돌변한다.

올초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신인작가의 소설을 할리우드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나서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는 새러 로츠와 편집자이면서 소설가인 루이스 그린버그가 공동 필명 'S. L. 그레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그들의 다섯 번째 소설이 그것이다. 이 작품 역시 지금 당장 영화화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감각적인 장면 전개와 밀도 있는 스토리 전개가 인상적이다. 게다가 실제로 미국에선 테러 공포로 인해 지하벙커가 인기가 있어 최상위층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집 앞마당 지하 5미터 지점에 설치하는 벙커가 보급되고 있다고 하니, 이 작품 속 상황은 언젠가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벙커는 집안에서 바로 이동이 가능하며, 핵폭발은 물론 생물학전, 화학전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공간으로 삼천 만원에서 오천 만원의 가격으로 2011년부터 보급되고 있다고 하는데, 굳이 재난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솔깃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이야기가 더 와 닿고, 오싹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실재 상황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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