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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도시 ㅣ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8
퍼트리샤 콘웰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결혼식 행사로 사람들이 붐비던 숲에서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20대 남자가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맥박도 뛰지 않았고, 생명의 징후도 없었기에 구급대원은 사망상태로 확인하고 영안실로 보낸다. 그런데 밤새 냉장실에 있던 그 시신은 아침에 피를 꽤 많이 흘린 상태로 발견된다. 시신이 인계될 당시만 해도 남자에게선 피가 흐르지 않았었는데, 죽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피를 흘릴 수도 있는 걸까. 구급대원들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걸까. 만약 영안실 냉장실 안에서 남자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시트로 덮어, 영안실에 보관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뭐 공포 영화도 아니고 말이다.
'숨기지 마.' 난 그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숨기고 있다. 벤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쳐다보고 있다. 어둑한 계기판 불빛에 날카로운 옆모습이 비친다. 우리는 항상 이렇다. 비밀스러운 특정 정보들은 피한다. 우리는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춘다. 가끔은 거짓말도 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를 속였다. 그때 벤턴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상대방을 속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직업적인 필요에 의해 서로를 속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벤턴은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난 진실을 원한다. 내겐 진실이 필요하다.
마침 스카페타가 6개월간 군법의관으로 근무 후 이제 복귀하려는 차에 이런 사건이 생겨 버렸다. 복귀 전 그녀가 막 부검을 마친 사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폭발 사고로 희생된 흑인이다. 아들의 어머는 죽은 아들의 정자를 추출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입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 요구하고, 그걸 거절하자 그녀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며 항의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 자기 집 뒷마당에서 놀던 여섯 살짜리 아이의 머리에 누군가 못을 박아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범행을 자백한 사람의 어머니가 편지로 하소연을 한다. 아들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사람들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버드에서 조니는 무인 정찰 차량에 관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했는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무인 정찰 차량이란 심장마비로 즉사했던 남자의 아파트에서 나온 모트와 같은 군대용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스카페타는 이들 사건들 이면에 대량 살상을 유발할 수 있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이 누구인지 실체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작품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그것도 무려 18편이다.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로 아마 가장 많은 편수가 아닐까 싶은데, 법의학 스릴러가 독자들에게 얼마나 흥미로운 분야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시리즈에서 콘웰이 서술하는 기술들은 실제 법의학에서 사용되는 최첨단 기술들이라 매우 리얼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어렵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정보들로 가득한 법의학 스릴러의 시리즈가 이렇게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건, 분명 이 작품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시리즈가 미드 CSI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것에 힘을 더해주고 있고 말이다.
처음으로 죽은 환자의 차갑고 아무 느낌이 없는 몸에 메스를 대고, 처음으로 Y자형 절개를 했을 때 나는 뭔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신이나 영웅일 수도 있고, 죽음조차 이겨낼 수 있는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생명체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거부했다....아마 병리학을 선택한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의사보다 정직해졌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정성껏 도와줘도 나나 내 의사로서의 태도에 감동받지 않는다. 그전과 똑같이 죽은 상태일 뿐이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한다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낸다거나,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건 병리학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실감한다는 건, 해군에 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 산맥에 배치되고 나서야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번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10년 만에 부활한 스카페타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일 것이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야 수년간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 반가움이 있을 테지만, 만약 이 작품으로 시리즈를 시작한다면 이 방식이 조금의 어려움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의 진짜 이면을 그녀가 발견하게 되기까지 숨겨진 부분들이 많고, 엄청난 정보들과 복잡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간의 이익 관계 등이 얽혀 있어 플롯을 파악하는 것이 극중 화자인 스카페타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부의 진행에선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몰입감도 좀 약한 편이다. 중반부까지 스카페타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어 나가다 보면, 대체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거냐고 그녀처럼 소리지르고 싶어지니 말이다. 물론 다소의 지루함을 참아낸다면 스카페타 시리즈 특유의 탄탄한 재미를 결국 만날 수 있지만, 이번 시리즈는 조금의 인내는 필요하다. 연구실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와 군대와 연관된 숨겨진 과거의 기억 등 그 동안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왔던 이들만 파악하기 쉬운 부분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물 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 바로 인물들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쌓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재미는 그 어떤 작품보다 스카페타 시리즈가 최고 아닐까 싶다. 처음, 마흔 살의 나이로 법의국장에 부임한 스카페타 박사와 그녀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강력반 형사 피트 마리노, 스카페타의 조카인 열살 컴퓨터광 루시, 점잖은 FBI 프로파일러인 벤턴 웨슬리에서 시작했던 이 시리즈는 18편까지 진행되면서 인물들이 나이를 먹고, 관계를 쌓고, 변하기도 하면서 그들만의 '삶'을 구축해나간다. 스카페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루시는 어느 샌가 그녀의 곁에서 업무를 서포트해 주는 든든한 인력이 되었으며,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던 벤턴과는 결혼해 부부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스카페타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이들은 점점 페이지 바깥으로 나와 살아 쉼 쉬는 캐릭터들로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책장에서 잠자고 있는 기존 시리즈들을 다시 한번 꺼내보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사망했어도 시신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시나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역시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