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조조 모예스 지음, 송은주 옮김 / 살림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이야기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26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페론에서 시작한다. 독일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이곳엔 음식도, 자유도, 웃음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오죽하면 음식을 먹는 꿈을 꾸어야 할만큼 허기진 그들은 독일군 트럭 뒤 칸에 실린 돼지우리에서 빠져 나온 아기 돼지 한 마리를 빼돌려서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라기를 바라면서 몇 주 동안 도토리와 음식 찌꺼기로 살을 찌우는 중이었는데, 누군가 그걸 독일군에게 밀고해 호텔 르코크루주에 독일군 사령관과 부하들이 찾아온다. 독일군이 돼지를 찾아내면 그들은 모두 체포되고, 목숨 조차 부지하기 어려워진다. 소피는 불안해하는 동생 엘렌과 그녀의 아기, 그리고 아래층에 온 독일군에게 이미 잡혀있는 동생 아우렐리앙을 보호하고,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돼지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소피의 용기 있는 결단과 행동이 돋보이는 이 에피소드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 한 장면으로 소피라는 캐릭터는 페이지 속의 인물이 아니라 페이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의 매력적인 인물이 되어 버린다.

조조 모예스의 사랑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아이들로부터 최악의 것은 숨기려 했지만, 아이들은 남자들이 길거리에서 총에 맞고, 금지된 숲 속을 돌아다녔다거나, 독일군 장교에게 제대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낯선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들의 머리채를 잡아 침대에서 끌어내는 세상에 있었다. 미미는 말없이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의 세상을 봤다. 엘렌은 그것을 마음 아파했다. 아우렐리앙의 가슴에는 분노가 쌓여갔다. 화산의 힘처럼 그의 안에 분노가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매일 동생이 마침내 폭발하더라도 그로 인해 너무 큰 대가를 치르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위험천만했던 그 첫 번째 에피소드 덕분에 소피는 그녀와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매일 독일군의 저녁 식사를 차려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매일 밤 그곳에서는 숨막히는 긴장과 분열이 일어나지만, 독일군 사령관은 점차 소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가 관심을 표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녀의 집에 있는 소피의 초상화 때문이었는데, 인상주의 화가였던 그녀의 남편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소녀는 오로지 표정으로 만족감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대단한 용기와 자부심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물론 굶주림과 공포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소피에게서 그림 속의 소녀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림을 볼 때마다 남편인 에두아르가 돌아올 때는 다시 한 번 그가 그렸던 그 소녀가 되겠다고 맹세하곤 한다. 하지만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식량은 점점 더 줄어들고, 마을의 상황은 나빠지기만 한다. 그러던 중 소피는 남편이 최악으로 소문난 교화 수용소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남편의 자유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로 인해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산산조각 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부터 약 100년 후인 2006년 런던에서 제2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현재에서 주인공은 젊은 미망인 리브, 그녀는 건축가인 남편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리브의 유일한 보물은 신혼여행 중에 남편에게 선물 받은 여인의 초상화, 우리가 이미 지나온 과거 속의 바로 그 그림이다. 그리고 약탈당한 예술품을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해주는 일을 하는 전직 경찰 폴이 등장하고, 우연히 리브와 알게 되어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폴은 리브의 집에서 자신이 소송을 맡게 된 바로 그 문제의 그림을 발견하고, 그녀와 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 소송 다툼이 시작된다. 사실 이야기의 분량은 과거보다 현재가 두 배정도 많다. 하지만 내가 리뷰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현재의 이야기는 짧게 언급한 이유는 100년 전의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고, 몰입감 있고,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2부가 시작되면서 스토리는 많이 평범하게 진행되어 다소 루스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흘러 가면 조조 모예스가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드는 지점이 후반부에 등장하고, 그림 한 점을 둘러싼 세기의 공방이 이어진다. 남편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여자와 도난 당한 그림이기 때문에 반드시 유가족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남자. 그렇게 이야기는 런던에서 프랑스로 가서 소피의 후손을 찾아가게 되면서, 우리 모두가 궁금했던 소피의 나머지 삶에 대해서 알게 된다. 소피가 위험한 선택을 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그제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르코크루주에 걸려 있어야 할 그림이 어떻게 런던에 있는 리브의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미스테리가 더해져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제가 본 여자와 당신이 묘사한 소피를 연결하기가 힘들군요. 제가..... 그녀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답니다. 언제나 그 그림을 참 좋아했어요."

그가 고개를 약간 더 쳐든다. 모가 프랑스어로 옮겨줄 동안 그는 그녀한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활기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다. "넘쳐 보였어요."

조조 모예스를 우리 나라에게 처음으로 소개해주었던 작품 <미 비 포유>는 사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매력적이고 돈까지 많은 젊은 남자와 집안 형편상 돈을 벌어야 하는 씩씩한 여자의 만남이라는 다소 뻔한 설정에서 시작했지만, 그 흔한 신파나 눈물 한 자락 없이, 현실을 직설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여타의 최루성 신파 멜로, 휴먼 드라마의 패턴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지마비환자와 간병인, 게다가 엄청난 부자 남자와 평범한 집안의 젊은 여자라는 이야기 거리만으로도 앞으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너무도 뻔히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의 휴먼 멜로 드라마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할 것 같았지만, 지나치게 담백하고, 때로는 유쾌하고, 잔잔하게 따뜻하며, 거기에 추가로 목이 메일 것 같은 슬픔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평범한 멜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 작가였기에 이후에 출간되는 그녀의 작품들에도 항상 관심이 갔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에서는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가치', 그리고 그걸 넘어서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 보내고 기다리는 여자 소피와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망연자실한 미망인 리브가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혼자의 힘으로 온갖 고난과 상실을 딛고 자신 앞에 닥친 문제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은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 '인생'이란 것의 의미와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랑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을까. 전쟁과 사별이라는 엄청난 시련 앞에 선 여성 캐릭터의 모습은 무엇보다 공감과 이해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 있어 이번에도 조조 모예스가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저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