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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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좋아하는 책 중에 <빨강 머리 토리>라는 동화책이 있다. 아이의 태명이 '토리'였던 탓에 우연찮게 선물 받은 책인데, 내용을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도 참 좋아해서 책장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보았던 책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토리는 머리색이 빨갛다는 것 때문에 친구들이 놀리는 것 때문에 속상했는데,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머리카락이 커다랗게 자랐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토리의 머리는 지리 시간에는 지도 모양으로, 과학시간에는 행성 모양으로, 역사시간에는 나폴레옹 모양으로 마구 바뀌게 된다. 토리는 부끄럽고 창피했고, 걱정으로 머리가 아파오더니 몸까지 아파서 학교를 하루 쉬게 된다. 다음날 몸은 좀 나아졌지만 너무 가기 싫은 학교에 억지로 등교해보니, 친구들과 선생님의 머리 모양이 모두 각양각색의 커다랗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친구들과 깔깔대며 웃으며 토리는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친구들 덕분에 다시 평범한 누군가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머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빨강 머리여도 괜찮아. 머리가 제멋대로 자라도 괜찮아. 나는 나라서 아름다운 거야. 라고 말이다. 우리는 원래 모두다 정말 다른 존재이니까 말이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동화책이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참 따뜻한 위로 같은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남과 다르면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부터 가르치는 우리 사회의 풍경 속에,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통해 느꼈던 부분들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할머니가 있다는 건 아군이 있는 것과 같다. 그게 손주들의 궁극적인 특권이다. 자초지종이 어떻든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것. 내가 틀렸더라도. 사실은 내가 틀렸을 때 특히.

할머니는 검이자 방패다. 학교에서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사 더러 "특이하다"고 할 때, 엘사가 멍이 든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 교장선생님이 "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그럴 때 할머니는 지원군이 되어 엘사가 사과하지 못하게끔 한다. 자기 탓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엘사는 일곱 살 이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다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해,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왕따, 선생님들에게는 눈엣가시이며, 주변 어른들에게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독특한 존재이다. 해리포터에 열광해 그리핀도르 목도리를 두르고, 빨간 사인펜을 넣고 다니며 누군가 맞춤법을 틀리면 사인펜으로 고쳐 준다. 엘사는 그야말로 다른 아이들과 완..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엘사는 말 그대로 애 어른 같은 캐릭터이다. 당연히 친구도 없고 말상대라고 해 봤자 병원 운영으로 너무 바쁜 엄마를 제외하고 할머니뿐이다. 그런데 엘사의 할머니 또한 만만치 않게 독특한 캐릭터이다. 일흔일곱의 그녀는 괴팍한 성미에 입이 거친 걸로 유명하고, 손녀인 엘사에 관한 일이라면 병원에서 탈출할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이야기의 시작도 그녀가 병원을 탈출해 동물원에 무단 침입해서는 경찰한테 똥을 던져서 경찰서에 있는 걸로 출발하니 말이다. 사실 그날은 학교에서 엘사를 미워하는 상급생이 엘사를 때리고 목도리를 찢어 버린 날이라, 그걸 잊어버리게 하려고 만든 상황이었다. 그녀의 신조는 '나쁜 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면 좋은 걸로 덮어버려야지'였으니 말이다.

엘사의 엄마는 할머니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며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다.  기본적으로 질서 정연한 엄마와 언제나 뒤죽박죽인 할머니는 자주 옥신각신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거의 모든 것을 놓고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이한 행동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손녀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게 하는 양분 역할을 한다. 남들과 다른 엘사에게 교장 선생님이특이하다거나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남들과 다른 건 특별한 거라고 가르쳐주는 멋진 할머니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야기가 시작할 때부터 병원에 있었고, 그러니까 암이다. 그래서 이야기 초반에 일찍 하늘 나라로 가 버린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엘사에게 편지 배달이라는 임무를 맡기고, 엘사가 사람들을 찾아 할머니가 그들에게 사과하며 전하는 안부 편지를 전달해주는 것이 거의 스토리의 전부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도사였던 할머니와 엘사만의 비밀스런 왕국이었던 깰락말락 나라,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섯 왕국 가운데 하나인 미아마스에 대한 스토리 또한 이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할머니와 엘사가 공유하는깰락말락나라라는 판타지적 설정은 묘하게 현실을 비추어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의 진리를 거울처럼 비춰 준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손녀인 엘사까지 모녀 3대의 가족사와 아파트에 함께 사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이웃들의 사연까지 엮이게 되면서 이야기는 뭉클하고, 기분 좋게 흘러간다.

믿음이 있어야 해.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믿음이 있어야 동화를 이해할 수 있다. "뭘 믿는진 중요하지 않고 다만 뭐라도 믿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거면 차라리 전부 다 잊어버리는 게 낫지."

결극 이 모든 사태의 핵심은 그것일지 모른다.

이 책은 <오베라는 남자>로 엄청난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다.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한 오베라는 캐릭터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유쾌하면서도 울컥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작품이라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았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스토리, 그리고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이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게 만들어주었던 책이라, 프레드릭 배크만의 다음 작품은 그냥 덮어놓고 무조건 궁금했고, 읽고 싶었다. 오베라는 캐릭터에게 워낙 반해 있던 터라, 사실 이번 작품의 주인공도 엘사의 슈퍼 히어로인 할머니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곱 살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 아이 또한 전작의 오베 못지않게 독특하고, 개성 있고, 살아있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특이한 사람들의 숫자가 어느 선을 넘으면 아무도 더 이상 평범해질 필요가 없다. 그때는 더 이상 튀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피해 다닐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된다. 괜찮다. 모두 다 괜찮다. 뚱뚱해도 괜찮고, 키가 작아도 괜찮고, 공부를 좀 못해도 괜찮다. 당신은 당신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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