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평점 :
음울한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를 쓰는 소설가 안자이 도모야는 아내인 유메코와 함께 산장에서 신작 <어둠의 여인>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와인을 마시다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난다. 이상한 건 자신은 선천적으로 알콜에 강해서 지금까지는 숙취에 시달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욕가운은 아내의 것이었는데, 아내는 섬세하다 못해 강박관념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라 목욕가운을 바닥에 내던져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어디선가 곤충의 날갯소리를 듣는다. 설마 싶었지만, 소리가 들리는 창문으로 다가가 두꺼운 커튼을 열자 불쾌한 날갯소리를 내는 말벌이 보인다. 그는 의사의 경고를 떠올리며 온몸에 소름이 끼쳐 왔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국어사전에 쓰여 있다. 시험적으로 식재(재앙을 막음)와 즉사라는 단어를 찾아봐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속재와 속산이다.
안자이 도모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신의 날갯소리>의 한 구절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 사이에 적새라든지 족살 등 다른 단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 비춰보니 기묘하리만큼 암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자이 도모야가 말벌을 보며 그렇게나 당황했던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데, 3년 전에 우연히 말벌에 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던 거다. 퇴원할 때 의사는 벌침은 처음에 쏘였을 때보다 두 번째 쏘였을 때가 훨씬 위험하다며, 처치가 늦으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내라면 몰라도 이렇게 눈 쌓인 산 위에 아직 활동 중인 벌의 둥지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다. 거기다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휴대전화 충전기도 보이지 않았고,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도 없어졌고, 팩스기 배선 또한 이미 손을 본 상태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는 걸 깨달으며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아내인 유메코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범인을 찾을 때가 아니라, 일단 말벌로 부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벌에 쏘일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간이형 주사기 에피펜마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야말로 말벌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초겨울, 해발고도 1,0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산장에서 혼자 말벌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란 마치 악당과 대결을 하는 것만큼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던 내용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표현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상하던 스토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그 녀석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쓴 작품이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분신이 쓴 것이 아닐까?
거의 산장에서 온갖 방법으로 말벌을 피하고, 쫓고, 죽이려고 하는 인물의 모습에 대한 묘사만 백여 페이지 넘게 이어지지만,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는 점이 기시 유스케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인간 내면의 공포에 대한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말벌이라는 독특한 소재만으로 매우 간결하게 스토리가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전달해주고 있다. 극중 미스터리 작가인 안자이 도모야와 동화 작가인 아내 유메코의 작품이 종종 인용되는데, 아마도 작가는 그런 부분들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미스터리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은, 마치 서술트릭처럼 독자들을 화자가 하는 말에 완전히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몇몇 미스터리 물에서처럼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하게 되기도 하고, 서술트릭에서처럼 독자를 당황시키는 '반전'이 출현하게 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결말은 과연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기시 유스케가 공포를 바탕으로 한 심리 스릴러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작가라서 더욱 독자들이 깜박 속아넘어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역시 기시 유스케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