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 이브, 런던의 누추한 곳에 살던 한 남자가 자살을 한다. 고독했던 그는 옆 방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옆 방에서 신음과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쾌락에 겨운 그 소리는 그에게 너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결국 그는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 역시 주검으로 발견된다. 남자가 들었던 소리는 쾌락이 아니라 독약으로 인한 고통스런 몸부림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녀 역시 고독과 삶에 대한 혐오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유서가 발견된다. 이것은 로맹가리의 단편 < -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스토리인데, 나는 '사랑'에 관한 이보다 더한 비극을 아직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였는데, '사랑'이란 언제나 각자의 상황만 볼 수 있을 뿐, 상대방의 입장을 전부 알기는 어려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행복해 보이는 그 혹은 그녀의 모습 뒤에 있는 진짜 얼굴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 알 수 없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싶을 뿐' 사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증명해줄 수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말은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긴 해도 옳은 문장은 아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나와 별개의 문제일 수 있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자명한 사실에 사람들은 한 번 더 상처받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일, 이것보다 더한 기적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릴리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가 그의 집에 서블렛을 통해 한 달간 렌트해서 살게 된다. 그는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들 부부는 곧 이혼할 예정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어렵게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로 살며 불행해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할 뿐,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같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얼마나 외로운 문장인가. 인간은 그렇게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서로를 향한 진실과 진심은 종종 어긋나곤 하니 말이다

뉴욕에서 유학중인 정인은 강의를 듣다 포토그래퍼 성주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이 함께 듣고 있는 강의의 강사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와 이별여행을 떠나며 자신들의 집을 한 달간 세를 놓고, 정인은 그의 흔적을 쫓아 그 집에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유명 화랑의 갤러리스트인 마리는 한국에서 온 젊은 포토그래퍼 성주와 동거를 시작하고, 그의 비자를 위해 비밀리에 결혼까지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상태이다. 독립 큐레이터인 수영은 뉴욕에서 만난 젊은 포토그래퍼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를 유산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로 한다. 한 명의 남자를 둘러싼 세 명의 여자가 1, 2, 3부로 나뉘어 각각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를 짝사랑한 여자, 그와 결혼한 여자, 그가 사랑한 여자는 모두 사랑 앞에서 홀로 쓸쓸해하고, 외로워 한다.

"결혼이란 건, 말하자면 앞으로 저 사람이 네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네가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어.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네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주는 고통이라면 견디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러면 최소한 덜 불행할 거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때때로 견디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얘기야.

 

실패로 끝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간다는 백영옥 작가의 신작 <애인의 애인에게>는 그러니까 결국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혼이나 섹스처럼 누군가와 함께 행복해져야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남자의 아내는 남편이 짝사랑하는 여자를 찾아가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원망도, 의심도, 슬픔도, 희망도 없이.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외도를 용서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기에,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외로웠던 여자에게, 누군가 옆에 있기 때문에 더 외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설명할 수 없듯이, 개별적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상상 저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 삶의 비극이기도 하다. 진심을 전달하는 무심함 때문에 무섭게 외로워하며 살아야 했던 여자와 누군가 딴 사람을 바라보며 곁을 주지 않는 남자의 등을 바라봐야 하는 여자 중에 누가 더 외로운 걸까.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지도 모르는데, 그의 흔적을 쫓아 다니며 살고 있는 여자는 또 얼마나 고독한 걸까.

이 책은 세상의 선의와 사랑을 믿고 싶어질 만한 러브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매번 누군가의 등만 바라보았던 당신이라면, 매번 마음을 주고도 돌려받지 못했던 당신이라면, 그리고 사랑에 상처받은 세상의 수많은 당신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처럼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을 보며  로 받고, 공감하며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자. 사랑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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