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서 허드슨 강으로 이어지는 웨스트 84번가에는 에드거 앨런 포 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포가 '갈까마귀'를 집필했을 때 살던 집이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1844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진짜 에드거 앨런 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은행강도 스타크는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리버사이드 파크의 낡은 철문 옆에 앉아 허드슨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낡은 철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죽은 사람처럼 퀭한 장발의 남성이 철문으로 덮여 있던 구멍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엗거 앨런 포라고 밝힌다. 그리고 바위에 난 구멍 속의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 백 년 전의 그리니치 빌리지를 보여준다. 와우, 세상에. 기본 플롯을 듣기만 해도 이야기가 마구 궁금해진다. 에드거 앨런 포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니 말이다. 이것은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저스틴 스콧의 <더할 나위 없는>의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애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둑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날 라나를 슬쩍 밀치던 그 애의 행동을 내가 완전히 오해한 걸까? 그것 역시 나는 모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는 것과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까. 혹은 어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어떠면 그 애는 애초에 그렇게 살게끔, 그 암울하고 불 꺼진 곳에서 죽게끔 운명 지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아닐지도.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다. 내게 있어, 그리고 모든 부모에게 있어,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란 그저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뿐임을.
-토머스H.쿡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그리고 토머스H.쿡까지!! 내가 사랑하는 최고의 작가들이 모였다. 거기다 뉴욕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즐기는 미스터리라니! 미스터리 작가 17명이 뉴욕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골라 이야기를 만들었다. 참여 작가 17명 중 10명이 뉴욕에서 태어났거나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그럴듯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센트럴 파크, 헬스 키친, 유니언 스퀘어, 타임스 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월 스트리트, 차이나 타운 등등.. 뉴욕 곳곳은 미스터리하고, 매혹적인 장소로 변신한다. 게다가 해당 장소에 대한 사진과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뉴욕을 아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의 히어로 잭 리처이다. 리 차일드는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플랫아이언 빌딩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23번가 지하철역에서 나온 잭 리처가 텅 빈 거리에 온통 폴리스라인으로 막혀져 있는,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뉴욕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제프리 디버는 보헤미안들의 수도인 그리니치 빌리지를 배경으로 평범해 보이는 제빵사의 이중 생활, 즉 스파이에 관한 미스터리를 만들었다. 리 차일드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과 제프리 디버의 <블리커 가의 베이커>는 단편이라 아쉬울 정도로 짧게 느껴졌던 이야기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두 이들이 시리즈 물에 얼마나 강자인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장편 미스터리의 최고 작가들이 써낸 단편은 너무도 매혹적이었지만, 사실 그 자체로도 완벽한 이것들은 장편으로 만들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토머스H.쿡의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는 소재와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것들로 문장과 단락을 만들어서 빚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더 매혹적인 작가답게, 단편이지만 여운을 남기는 결말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그의 유려한 문장들은, 이렇게나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맨해튼 주민들의 휴식처인 평화로운 유니언 스퀘어를 배경으로 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5달러짜리 드레스> 또한 토머스H.쿡의 작품처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간 손녀가 마주하게 되는 비밀이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평생을 한 침대에서 살아온 부부에게도 이렇게 엄청난 비밀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평방미터당 가격이 가장 높은 동네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를 배경으로 한 마거릿 메이런의 <빨간머리 의붓딸>에서는 뉴욕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비싼 사립학교에서 난데없이 유행하는 머릿니를 통해 짧지만 임팩트 강한 미스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숨쉬고 있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가족이기에, 질투와 비밀 등 미스터리로 풀어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은 단골 소재가 아닌가 싶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쓸 거요?"
"다시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포가 말했다. "베스트셀러까지 됐죠. 그래서 제 에이전트가 책에 아낌없이 자금을 쏟아 부어줄 출판사를 찾고 있어요. 무조건 미스터리를 쓰라 더군요.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미스터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해요. 하지만 에드거를 수상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저스틴 스콧 <더할 나위 없는>
그 외에도 차이나타운을 누비는 아줌마 탕정 부터, 수상한 뉴욕의 환경미화원, 이탈리아계 마피아 가족의 비극과 브로드웨이의 미결 사건,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이 만들어낸 죽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인의 버킷리스트에서 시작된 소동 등등... 뉴욕이라는 도시만큼 이나 다양한 미스터리 단편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다. 각 이야기마다 뉴욕의 특정 장소에 대한 설명과 사진이 담겨 있어, 미스터리 단편 앤솔러지인 동시에 뉴욕 여행 가이드 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흥미롭기도 하다. 특히나 국내에 그 동안 작품이 소개된 적이 없던 미스터리 작가들과의 만남도 미스터리 팬들에게는 마치 이 책이 종합선물세트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배경을 뉴욕으로 잡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뉴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추리소설이니까.” 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뉴욕이 얼마나 미스터리와 잘 어울리는 곳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미스터리는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죄가 발생했으며,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이상의 무엇이다. 왜냐하면 사실 미스터리는 우리의 복잡하고, 고단한 삶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마워, 친구." 여자는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했다. "천국이 따로 없어, 그렇지?"
정말 그랬다. 보석 같은 미스터리 단편들이 모여 있는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내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극중 에드거 엘런 포의 작품에 대한 논평을 빌려보자면, 이 책은 '흥미진진하다는 말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멋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미스터리 모음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