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 틀이다. 세계는 이와 같은 기본 틀을 흔드는 총성 없는 사이버 전쟁 중이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컴 오피스 업데이트 파일로 위장한 악성코드가 대량 유포되고, 청와대 사칭 해킹메일부터 삼성그룹 메신저 위장 악성코드까지 북한발 사이버 테러 주의보를 내린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다. 사이버 테러 관련해서 가장 많이 뉴스에서 언급된 것이 바로 북한인데, 그들은 과거에도 디도스 공격으로 주요 정부기관·포털·은행사이트·외국기관 등을 일거에 무력화시킨 적이 있으니 말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언론사 서버, 은행 전산망, 서울메트로 및 코레일 전산망들이 죄다 해킹 공격을 받았으니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테러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실제로 나도 전 직장에 근무할 때, 회사가 사이버 공격을 받아 난리가 났던 일을 직접 경험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뉴스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자신이 직접 피부에 체감하는 일을 겪지 않는 이상 이런 일들로 인해 세상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
그저 마우스 클릭 한 번만으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전쟁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 사이버 전쟁이라고 하면 비디오게임이나 떠올려. 아주 깨끗한 전쟁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새로운 사이버 무기를 개발 중이고 아무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뿐이야. 핵무기라고 하면 일단은 너부터도 겁을 내지. 히로시마나 비키니 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데 사이버 무기라고 하면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양국의 정부 기관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사회기반시설을 사이버 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거라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지팡이 모양 사탕을 매달 듯이 가볍게 최후의 심판 일을 도래시키는 거야."
여느 때와 같았던 추수 감사절, 뉴스에서는 미국 정부의 웹사이트가 해킹됐고, 항공모함을 두고 중국해군과 미 해군이 대치중인 상황에서 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마트의 바코드 스캔 장치가 작동을 멈춰 한 시간이 계산대에서 기다리던 성난 사람들은 돈도 내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가버린다. 이어서 보도되는 뉴스는 중국 전투기의 추락,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물류 시스템이 멈춰버리고, 조류 독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들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리기 시작한 작은 눈송이들마저 사람들을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고 있었다. 휴대폰 네트워크며 인터넷이 다운되고, 전국의 응급 의료 서비스가 엉망이 되고, 눈보라를 시작으로 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사람들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조차 없는 상황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짓인지, 중국인들의 공격인지, 그냥 지나가 버릴 사소한 문제들인지 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기가 끊어져있고, 창 밖으로는 눈이 휘날리고, 눈 섞인 돌풍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의 비상사태통제 시스템의 90퍼센트를 한 회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사실 회사 하나만 해킹하면 이렇게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을 교란시키고, 보급선을 끊고, 대중교통을 마비시키고, 통신을 두절시키고, 민간인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겁을 주고, 산업 기지를 박살내고, 전기 공급이 차단되고, 사이버 공격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형태를 띠고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려 두 달 가까이 지속된다. 과연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 폭풍 속에 고립되어, 전기, 난방, 수도가 끊기고 통신도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복도에 앉아 있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기시감이라고는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레나가 70년 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겪었다고 한 일을 내가 여기서 다시금 겪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이버 전쟁은 미래와는 무관하게 이미 과거의 일부인 듯했다. 마치 병에 걸린 벌레처럼, 서로에게 끝없이 고통을 가해온 인류의 본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를 돌아보면 된다.
결혼 전 원룸에 살 때, 가끔 두꺼비 집 차단기가 내려가 정전이 되곤 했었다. 요즘 시대에 웬 정전이냐 싶겠지만, 어이없게도 강남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곤 했다. 건물 자체가 워낙 낡기도 했거니와,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터라 종종 일어났던 상황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굉장히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가 차단되거나, 인터넷이 끊기거나, 해킹으로 인해 개인정보가 털리거나 다들 한번쯤은 겪어 봤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를 너무도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들은, 현재의 사회 기반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세상에 어떻게 익숙해져 있는지 여실하게 깨닫게 만들어 주곤 한다. 하물며, 이렇게 사소한 일들도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마비가 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매튜 매서의 <사이버 스톰>은 그렇게나 현실적으로 리얼한 지옥의 풍경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극사실주의 종말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구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타의 종말소설, SF소설과는 다르게 실제 사이버 보안 및 컴퓨터 나노 기술 등 IT 전문가인 저자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있을 법한' 일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무시무시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