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세계 곳곳에서 모체사망증후군 MDS(Maternal Death Syndrome)라는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임산부와 태아 모두를 죽게 하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임신하지 않기 위해 피아 이식형 피임제인 임플라논 시술을 받는다. 임신하고도 살아 있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MDS가 돌기 전에 임신한 것이라, 그들이 출산하고 나면 다시는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일까. 결국 이 얘기는 현재 살아 있는 가장 어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될 거라는 거다. 더 이상 세상에 아이들은 없을 테고, 언젠가는 죄다 노인밖에 남지 않게 되고, 그들 마저 죽고 나면 인류는 멸종할 거라는 말이다. 무시무시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MDS는 하나의 균열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온 세상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냉동 배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그 아기들만이 희망이었다.

제인 로저스의 이 작품을 단순히 허구의 공상 과학 SF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조금 섬뜩한 것이, 바로 요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중남미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지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 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카 바이러스는 면역력에 문제가 없으면 감기처럼 살짝 앓다가 지나가거나, 아예 증상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문제는 임산부라고 한다. 임산부가 감염이 돼서 태아에게 바이러스가 전이되면 신경계 세포를 공격해 소두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두증 태아는 임신 중이나 출생 직후 사망하거나 생존하더라도 뇌성마비, 시각 또는 청각 장애 등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작년 한해 메르스 사태를 겪어봤지 않나. 해외에서 감염된 사람이 걸러지지 않고 입국하고, 그 대응에 실패하게 되면 확산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임산부를 공격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결국 멸망하게 될 거라는 세기말적 설정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배경은 분명 '공상과학' 어딘가에 있는데, 진행되는 스토리는 '청소년성장' 드라마라는 점이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공감대 형성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굉장히 단순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는데, 사실 정치적인 여러 부분들을 걸러낸 그것이 바로 일반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진짜 이니 말이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뿐이에요."

"아니, 넌 몰라. 환상에 사로잡혀서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제가 선택한 일을 할 거예요."

"세상을 구하겠다, 그거구나."

"그러면 안 돼요?"

아빠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야."

"대충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삶이 쓸모 있기를 바라요."

제시 램의 아빠가 인공수정 전문 병원에 있는 배아 연구소에서 일하는 덕분에, 그들 가족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재 진행되는 상황과 대응책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MDS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만들어낸 것은 일명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는 방법이었다. 임신 초기에 MDS 증상을 약화시키고 마취제를 투여하게 되면 아기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약으로 산모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MDS는 임신중인 임산부의 두뇌를 파괴한다. 그렇게 임신 막바지에 의사들이 죽은 산모로부터 제왕절개수술로 아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MDS가 아기가 아니라 엄마를 공격하므로, 아기는 엄마 몸에서 필요한 것을 계속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인데, 사실 누군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끔찍하기 그지 없다. 이어서 마련된 두 번째 대책은 MDS 백신인데, MDS가 나오기 전에 시험관아기 시술을 위해 냉동실에 보관된 깨끗하고 건강한 배아에게 예방접종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MDS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퍼진 상태라 이 방법을 시도하려는 여자들 역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아기들만이 유일한 희망인 세상이라니.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녀의 생각은 단순했고, 순수했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아빠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는 첫 시위를 당겨야 해요."

왜냐하면 이것 말고 세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었기에.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대리모가 되어 아기를 탄생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떠들기만 하고, 걱정만 하는 것은 사실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일어나게 '행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제시 램의 부모와 친구들은 그녀의 선택을 말리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이건 절대 미친 짓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밀어 붙인다. 그 결과 아버지에 의해 감금 당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 어린 소녀의 결연한 의지는 무모해 보이지만, 그만큼 묵직한 감동을 준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 이렇게 여운이 길게 남는 SF 문학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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