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누군가의 일생을 쭈욱 나열한 것만큼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이 없다. 너무도 뻔해서 굳이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나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에 호기심이 슬며시 생기니 말이다. 우리가 SNS를 하는 것도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해서 공감을 받거나, 혹은 남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대리만족을 받거나 위로를 받거나.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는 한 인물이 태어나면서부터 삼십 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여과 없이, 낱낱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매우 담담한 어조로, 특별한 클라이막스 없이 담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1권이 끝이 날 때까지 주인공의 현재가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하게 어린 시절부터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은 그런 기분마저 든다. 꼭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칭찬하고 때로는 안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로 있자'라고 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누나의 폭거는 손해였다.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로 있으면 있을수록 어머니나 주변 어른들은 내가 바라는 애정을 쏟아주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아직 손해나 이익이라는 말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그 감정은 이미 경험했다. 그리고 네 살이 되어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는 완전히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며 이야기는 주인공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는 아이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그가 스스로 자신다운 등장이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공감되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곧바로 뛰어들지 않고 공포부터 느껴 우선 멈췄다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그 세계에 발을 내딛는 성격을 가진 아유무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요란했던 누나의 성격을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2주나 먼저 나오려고 했다가, 정작 출산 순간에는 산도에 내려와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아 엄마가 빨리 나오라며 분노에 휩싸여 소리를 쳤던 누나의 탄생은 커가면서 어딘지 세상에 시비조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애초에 탄생시의 분노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미남미녀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 준수한 외모의 아유무에 비해 얼굴과 몸매에 문제가 있었던 누나는 매사 어머니와 대립했고, 누나와 어머니 사이에서 허둥거리던 아버지의 역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아유무는 그들의 대립에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세로, 그리고 되도록 얌전히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외모 덕분에 살짝 만 붙임성을 보여도 순식간에 사랑을 받는 캐릭터라 너무도 특이한 행동만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는 누나를 대신해 모두에게 사랑 받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 네 가족은 행복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세상은 유독 그에게 관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모든 걸 바꿔 놓게 된다.

"내가 믿을 것은 내가 정해."

내 발 밑을 개미가 기어갔다. 검은 몸은 밟으면 바로 찌그러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유무."

나는 개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도 네가 믿을 것을 찾아. 너만이 믿을 것을.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면 안 돼. 물론 나하고도, 가족하고도, 친구하고도. 그냥 너는 너인 거야. 너는 너일 수밖에 없는 거란 말이야."

 

해외 부임 중인 아버지 덕분에 이란에서 태어나 유치원 때 일본에 왔다가, 다시 이집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생활했던 그들 가족은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요란한 연애, 아빠의 출가에다 누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고 점점 더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유무는 서른 살이 되어 있었다. 여린 마스크와 훤칠한 몸은 여전했으나, 최근 들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닮은 용모 덕을 톡톡히 봤던 탓에, 그런 용모에 비뚤어진 열등감을 가졌던 그가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면서 숱이 적어지자 오히려 여린 마스크에 방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발모 클리닉에 가고, 온갖 종류의 모자를 쓰고, 그러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 모든 생활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게 열등감을 가지게 되자 등이 구부러지고, 말이 입안에서 웅얼거리게 되며,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어 그의 인상조차 바꿔버리고 만다.

네가 믿을 걸 누군가한테 결정하게 해서는 안 돼.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이상한 행동만 일삼으며 온 생을 세상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살았던 그의 누나가 절망 속에 남겨진 그에게 중요한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스스로를 믿으라고. 지금까지 내가 믿어온 것은 내가 있었으니까 믿었던 거라고. 내가 나인 한은 믿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유무는 누나에게서, 집에서 도망치고 만다. 누나는 어디선가 실컷 인생을 보내고 와서 우쭐해있는 거라고, 가족들로부터 도망간 아버지도, 누나를 간단히 용서한 어머니도,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애인도, 더 이상 일을 주지 않는 출판사 사람들도 모두 나쁘다고. 그들만이 나쁘고 자신만 나쁘지 않다고 세상에 귀를 막아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머리가 벗겨지고, 무직이 된 서른네 살의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걸 깨닫고, 초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친구를 찾아 이집트로 간다. 그리고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 그 동안 이 작품이 지루하게 쌓아왔던 수많은 이야기의 댐이 폭발한다. 이 장면을 위해서 무려 두 권이나 되는 분량 동안의 소소하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던 거구나 싶어 한 순간 페이지를 멈추고 시간의 결을 느껴 보았다. 나는 나, 내가 나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우선 스스로를 믿어야 뭐든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작품 덕분에 살아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그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걸 믿고 싶어졌다면 과장일까. 극강의 한파 속에 움츠려든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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