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술사 무블 시리즈 2
이원태.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눈속임? 사기? 손장난? 마술은, 상대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앞뒤 좌우를 따지지 않고 박수 치게 만드는 일. 마술사는 관객에게 손짓 눈짓 몸짓으로 계속 말을 건다.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다. 젊은 규수들은 환희가 검지만 까닥해도 딸려 왔다. 청명처럼 환희를 비웃고 사라진 여인은 없었던 것이다. 환희는 이 '' 거절의 여인이 어디 사는 누굴까 궁금했다.

말 물, 밝을 랑, 정자 루. 밝음이 없는 곳. 마술을 펼치기에 더없이 넓고 아득한 판을 조선의 도읍지 한양 사람들은 물랑라루라고 불렀다. 마술이 벌어지는 팔각형 판의 중앙 천장은 원각사지 10층 석탑보다 두 길이 높았고, 만석이면 무려 1000명이 동시에 마술을 구경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 게다가 창문이 없어 관객 입장 후 문을 달으면 외부의 빛이 전혀 들지 않아 관객의 눈에 오로지 마술사와 그가 선보이는 마술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특징이었다. 이렇듯 밝음이 없는 물랑루는 공맹이 지배하는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으니, 입장료를 낸 관객들은 양반, 천것 할 것 없이 공평하게 대접받았다. 그리고 이곳 물랑루를 주름잡던 광대패 이름이 바로 환희단으로, 이 패의 흥망을 쥐락펴락하는 으뜸 마술사가 환희였다. 구사하는 마술만 1000가지가 넘는 마술사인 그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청명은 궁궐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옹주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은 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고, 왕은 그녀를 가엾게 여겨 출궁 시키진 않았지만 곁에 두고 각별히 아끼지도 않았다. 청명의 거처인 작은 별당은 폐가처럼 고요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고, 말이 만들어져 험담이 되곤 하는 궁궐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레 익혔다. 인적 드문 밤에 돌아다니길 즐겼고, 누구도 모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혼자 소설을 읽는 시간을 즐겼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어머니의 오라버니 영의정의 외동딸인 은미였다. 구김살이 없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은미를 통해서 청명은 환희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다. 그녀는 마술도 믿지 않고, 환상도 없다 여겼지만, 물랑루라는 건물에는 관심이 있었기에 공연을 보러 가게 된다.

그리고 환희는 그날 밤, 마지막 마술을 하기 위해 여자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려야 하는 순간, 자신보다 물랑루와 허공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던 청명을 지목한다. 하지만 청명은 나갈 수 없었다. 평생 그늘에서, 어두운 곳에서만 살아왔기에 결코 판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환희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지목 받은 관객이 올라오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청명의 거절에 당황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 나라의 왕이시니 못할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다만 마술은 공연하는 판을 없애거나 찾아오는 관객들을 내쫓는다고 사라지지 않사옵니다. 마술은 마음이 만들기 때문이옵니다."

"마음이 마술을 만들다니?"

"현실을 견디기 힘든 사람은 저마다 황당한 꿈을 꾸옵니다. 이뤄지기 힘들지만 그 꿈을 꾸는 동안엔 위로를 받사옵니다. 마술은 그들의 꿈을 판 위에 잠시 옮겨 보여 주옵니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마술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마술을 만드는 것이옵니다."

이 작품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조선시대에도 마술사가 있었다는 작은 기록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가 김탁환과 기획자 이원태가 결성한 창작 집단 '원탁'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며 모바일로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호평을 얻었고, 다음달에는 유승호 주연의 영화로 개봉될 예정이다. 기획 단계부터 영화, 웹소설,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어 '‘원 스토리 멀티 유즈의 제대로 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로맨스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인 웹소설로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서 공개되어 한 달 동안 7만 뷰를 달성했다고 하니, 다음달에 개봉할 영화에도 어느 정도의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재미있는 건 웹소설 특유의 속도감 있는 빠른 스토리 진행과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한 문장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종이책으로 처음 만난 나 같은 독자들도 만족시킬 만하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의 마술사와 사랑에 빠진 공주가 등장한다고 하니, 뻔하고 닭살스런 로맨스 소설 아닐까 싶었는데, 시대적인 배경과 마술이라는 매혹적인 장치가 만나 매우 그럴싸한 작품으로 탄생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태어나서부터 계속 고독하게, 어둠 속에서 자신을 감추며 살아와야 했던 공주 청명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마음에 들었다. 왜 소설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환희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일상이 지리멸렬했어. 소설엔 지리멸렬함을 단번에 날려 버릴 보물이 숨어 있지." 그리고 그 보물이란 바로 "등장인물의 마음. 그 마음만이 시시하고 하찮은 하루하루를 뒤흔들어 부수지." 라는 것이다. '마음'이라니, 청명은 정말 소설을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게다가 그녀는 소설을 필사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손수 옮겨 적고 나서는 간단한 후기를 여백에 적어두곤 했다. 이야기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걸 글로 옮겨 적고, 나아가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가 여러 장르의 책 중에서 유독 소설만을 편애하는 이유도 바로 그녀와 같다. 바로 소설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인물들의 피부 속까지 파고들어 마치 페이지마다 그들의 땀과 체취가 느껴지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내 마음과 동일시 되는 순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중 환희의 마술에는 백성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 넘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술사와 소설가는 상상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마술을 소재로 한 소설은 꽤 많았지만, 이렇게 로맨틱한 작품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마술이 시작하기 전, 암전 상태에서 곧 펼쳐질 신비로운 무대를 기대하듯, 그렇게 설레이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