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름이 없는 자
르네 망조르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이래저래 마음을 다잡고 충격을 다스렸다지만 어젯밤 보았던 광경은 그를 바닥부터 흔들어놓았다. 경찰 일 하면서 시체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별의별 꼴을 다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사건에는 '흉측한 것' '신성한 것'이 거북하고 심란하게 엉켜 있었다. 어떻게 사람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얼마나 악으로 똘똘 뭉쳐야 사람 배를 가르고 생선 내장 빼듯 장기를 꺼낸 다음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 꼴을 보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갈 수 있을까? 이성을 지녔다는 인간이 불행의 막장 그 어디까지 내려가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걸까?

여느 때처럼 살인 사건 현장에 베테랑 수사관 매케나 경감이 도착한다. 문제는 살인의 방식이다. 마치 의식을 방불케 하는 살인으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장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24시간도 되지 않아 벌써 두 번째 살인이었다. 배가 갈라진 시신에서는 장기가 모두 사라졌고, 라오스 불교의 장례 의식에 따라 시신이 수습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용의자는 피해자를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노부인이었다. 전과도 없을뿐더러 너무도 점잖은 칠십 대 할머니가 갑자기 미친 살인마로 돌변할 만한 동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너무도 뚜렷한 범행 흔적으로 쉽게 체포되지만, 그녀는 살인 행위와 그 직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다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기만 하다. 문제는 바로 이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도, 이후에 벌어지는 몇 건의 살인 사건도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살인이 벌어지고, 역시나 용의자로 검거된 이는 피해자와 가까운 주변인으로 그녀처럼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살해된 남자가 미국인인 데다 런던 주재 미국 대사와 친구 사이였던 터라, FBI에서는 유능한 범죄학자 달리아 라임스를 급파하고 그녀는 매케나 경감과 좋든 싫든 함께 일을 해야만 한다. 매케나 경감과 달리아 라임스는 각자의 가정 환경에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데다, 성격마저도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매우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엽기적인 살인 방식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붙잡힌 용의자들, 그러나 그들은 혐의는 인정하지만 정작 범행 순간은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피해자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에 고통스러워한다. 대체 그들은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그렇게 범인으로 붙잡힌 용의자들의 변호를 맡게 된 스타 변호사 닐스 블레이크 또한 만만치 않게 뚜렷한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질리언과 아이들은 매일매일 그에게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를 느끼게 했다. 분연히 악과 싸워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사악한 괴수들을 무찔러야 하는 이유. 그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세상보다는 더 살만한 세상을 물려줘야 할 이유. 질리언, 피터, , 이완, 마일스는 매케나의 우주를 규정하는 다섯 원소, 매케나의 신전, 신앙, 종교를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이었다. 기둥 하나만 사라져도 건축물은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거기서 살던 자는 그저 잔해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반이 훨씬 지날 때까지도 범인에 대한 윤곽은 전혀 잡히지 않고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 되어 간다. 추리, 스릴러 소설을 나름 꽤 읽었기에, 웬만하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훨씬 지나서도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작품은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그만큼 치밀한 플롯과 폭발적인 스토리 진행은 이야기를 확고하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세 명의 캐릭터. 매케나, 라임스, 블레이크.. 이들의 캐릭터를 너무 선명하게 그려놓아 눈을 감고 떠올리면 어떤 인물이 그려질 정도였다. 이 작품을 바로 영상화 시킨다고 해도 몇몇 배우들을 캐스팅 리스트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지나 결말에 이르면, 반전 때문에 허무했다는 기분이 아니라 오히려 짠한 마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 무시무시한 살인 행각의 동기도 결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 때문이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파오는 것이다. 매우 복잡하고, 거칠고, 난폭하지만, 그럼에도 감정적인 부분을 잊지 않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릴 수밖에 없게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특하게도 영화 감독이다. 스물일곱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속에 공존하는 일곱 개의 인격을 다룬 스릴러 영화 [미로]의 감독 르네 망조르의 두 번째 소설로 매우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장면 전환과 뚜렷한 플롯, 입체적인 캐릭터는 그가 가진 배경의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다중인격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를 소재로 그려낸 작품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지만,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면서 진행되는 스토리는 여타의 할리웃 스릴러 작품과는 꽤나 다른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그는 이번 작품으로 2014년 코냑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만큼 소설로서의 작품성과 대중성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영상을 '보여주는' 영화 감독이 글로 이미지를 형상화해야 하는 소설가로서의 감각까지 가지고 있다면 뭐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두 가지 다른 재능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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