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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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에 있는 와카바 은행 지점에서 마흔한 살의 계약 사원이 약 1억 엔을 횡령했다. 오래 근무한 정직원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계약 사원이, 그것도 1억 엔이나 되는 큰 돈을 어떻게 횡령했을까. 여타의 작품이었다면 이럴 경우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되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대체 '' 그런 일을 벌였을까에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실 저녁 뉴스의 헤드라인 감인 어마어마한 범죄 사건이라, 범죄를 모의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만 그려도 책 한 권은 나왔을 텐데 말이다. 대신 가쿠다 미쓰요는 평범한 주부가 그런 엄청난 사건을 벌이게 된 계기, 그리고 별것 아닌 것에서 시작된 그 심리 상태에 주목한다. 따라서 문장은 담담하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도, 치밀한 심리 묘사들이 쌓여 저절로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이 마치 다행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는 일본 평론가의 말처럼,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지점들은 무서울 정도이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그녀와 다를 바 없다.

 

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쯤 간단하지 않을까.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니, 우메자와 리카는 막현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다고 해서 죽는다는 건 아니고 완벽하게 행방을 감춘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이곳까지 왔다.

 

리카의 여고 시절 친구인 오카자키 유코는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화려하게 아름답진 않지만,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라고. 그만큼 십 대의 리카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끄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성적은 우수하지만 우등생은 아니고, 어디 하나 수선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교복은 세련되어 보였고, 누군가와 벽을 두는 법도 없이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던 어른스러웠던 아이였다고 말이다. 리카의 학생 시절 남자친구였던 야마다 가즈키는 그녀를 욕심 없고, 조심스럽고, 꼼꼼하고,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에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타입의 사람으로 기억한다. 리카가 전업 주부이었을 때 요리 교실을 함께 다녔던 주조 아키는 예쁘고, 얌전하고 성실했던,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했던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이렇게 그들은 뉴스에 등장한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지명수배자라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저런 일을 벌일 리 없는데, 내가 알던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인데.. 하면서 말이다.

 

스물다섯에 결혼한 리카는 결혼을 계기로 카드회사를 관두고 전업 주부가 되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고 요리 교실을 다니고, 집안 일을 하며 사는 것에 금새 지루함을 느낀다. 3년 만에 결혼 초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하던 일이 점점 색이 바래지고, 주부인 자신의 삶이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은행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물론 죄책감은 있었다.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나 리카에게 그것이 범죄라는 의식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조는 고타의 가족이고, 고타의 말대로 그 예금 총액에서 보면 고타가 빌린 액수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만 빌려서 이자를 붙여 돌려놓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고타가 반년 이내에 갚지 못하면 자신이 대신 갚아주면 된다고 조차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화장품 가게에서 계산을 하려다 수중에 있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가, 고객에게 맡은 현금 봉투에 있는 돈을 떠올린 것이다. 잠깐 빌려 쓰고 돌아가는 길에 돈을 찾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고가의 화장품을 산 자신을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조금 비쌌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제대로 된 것을 써야 한다는 식으로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하지만 훗날 그녀는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도록 떠올리게 될 거 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돈을 다시 벌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녀는 돈이 주는 힘을 누리기 시작하고, 그러던 중 남편의 전근이 결정되어 출장이 잦아지고, 그가 없는 주말 동안 그녀는 무려 열두살 이나 연하인 고객의 손자와 시간을 자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청년과 몸을 섞게 되고,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의 손길을 받은 적 없던 그녀는 새삼 누군가 자신을 만져주는 손길에 울컥하게 된다. 그렇게 가난한 고학생 고타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버블경제, 신용사회에 대한 고발을 그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도 비교할 만한데, <화차>가 미스터리 플롯, 사건 위주로 크게 이야기를 그려나갔다면 <종이달>은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평범했던 한 여성의 삶과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그 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화차>의 쇼코도, <종이달>의 리카도 그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슬프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녀들은 사실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리카는 도피 중에 이런 생각을 한다.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무엇 하나 없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얻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건지, 무언가를 잃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돈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돈을 펑펑 쓰면서 행복해하는 이도 있을 테고, 돈을 아껴가며 모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돈타령만 하며 빚을 지고 돈에 이끌려 사는 이도 있을 것이고, 계획대로 돈을 모으고 자신의 처지 만큼 아껴 쓰며 돈에 휘둘리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여기엔 내 모습도, 당신의 모습도,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겹쳐져 보일 수 있다. 이 작품의 정말 무시무시한 점은 나도, 당신도, 그녀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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