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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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내게 굉장히 모호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마치 등장 인물의 행동이 지문으로 설명되어 있는 연극 대본 같기도 했고, 영화 시나리오 분위기며, 카메라 같은 시점 또한 난해하고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다른 하루키의 책들과 달리 대충 읽고 어딘가 던져 놓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직장 초년생으로 매일매일이 전쟁 같이 바빴고, 퇴근 후에는 또 연애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기는 했지만 스토리가 뚜렷하고, 캐릭터가 명확한 이야기만 즐겨 읽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두서 없는 내 일상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분명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세련된 제목을 달고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고, 마냥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던 직딩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내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다가왔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이를 그만큼 먹어가면서 달라진 시선의 깊이 차이일 수도 있고, 그 동안 쌓아온 독서 이력으로 보는 눈이 달라진 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다시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내게 이 책은 평생 모호한 이미지로만 기억됐을 거라는 점이다. 당시에 대충 읽고 던져둔 이후로, 벌써 몇 번의 이사와 책 정리 시간을 거쳐왔던 탓에 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옷을 입은 이 책만 산뜻하게 기억해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만난 이 책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근사했다.

방 안은 어둡다. 하지만 우리 눈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다.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 마리의 언니 에리다. 아사이 에리.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알겠다. 어두운 물이 흘러 넘친 양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작품은 이렇게 누군가를 관찰하는 우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카메라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밤 11 56분에 시작해서 아침 6 52분에 끝이 난다. 어두운 한밤중부터 새벽이 밝아오기까지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마리와 에리, 두 자매를 관찰한다. 심야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 마리는 언니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난다. 형제가 없는 그는 형제라는 것이 어디까지 비슷하고 어디서부터 달라지는 건지 궁금해한다. 한 자매라도 인생을 사는 자세가 꽤 다를 수 있고, 외모며 성격이며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똑똑하지만 언니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동생 마리와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언니 에리는 언젠가부터 사이가 멀어진 상태이다. 게다가 에리는 한동안 계속 '잠들어'있는 상태이다. 뭐랄까. 마치 죽은 것처럼 말이다. 얼굴 근육 하나,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저 순수한 ''의 형태로 완결되어 있다.

어두운 방,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소녀, 전원 플러그가 꽂혀 있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 차갑게 한밤중의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텔레비전은 죽지 않았고, 특정한 영상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화면 에는 어느 방의 내부가 비춰져 있고,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다. 선명하지 않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이상한 기운.

그 방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십중팔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뭔가가.

동생 마리가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만나게 되는 중국인 매춘부,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기묘한 이름의 종업원들을 겪는 모험보다 언니 에리를 둘러싼 주변의 변화가 더욱 기묘하다. 하룻밤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마리의 이야기가 더 생동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두 달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에리의 상황이 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특히 에리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너무 모호하고 몽환적이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반대로 에리의 장면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제목인 애프터 다크의 뜻처럼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다가오는 새벽의 분위기가 에리라는 인물이 겪는 '세계를 넘나드는' 기분과 묘하게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 소녀의 세계와 그 방 안에 홀로 켜져 있는 텔레비전 속 세계가 어느 순간 뒤바뀌는 것조차 이상하다거나,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에는 이 책을 읽으며 참 하루키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담백한 어투가 너무도 하루키스럽다고 느껴지니 그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마리는 말한다. “왜 호텔 이름이알파빌이죠?”

“글쎄, 왜려나. 아마 우리 사장이 지었을 텐데. 러브호텔 이름이야 하나같이 대충 붙인다고. 결국은 남녀가 그걸 하러 오는 데니까, 침대하고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고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비스름한 것 하나만 있으면 돼.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거든요, <알파빌>. 장 뤽 고다르의.”

“못 들어본 제목인데.”

“꽤 오래된 프랑스 영화예요. 1960년대.”

한때 프랑스 영화에 미쳐서 문화원이며 영상회를 찾아 다닌 적이 있는데 (무려 이십여 년 전이라 요즘처럼 파일 공유나 디비디 구매를 할 수 없던 시절이다), 당시에 가장 많이 보았던 영화가 바로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카메라인데, 우리는 종종 영화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화면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카메라로 찍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다르의 영화에서는 카메라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영화라는 것이 이야기와 주인공의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빠져 있었던 고다르의 작품 이름으로 호텔 이름을 지은 걸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왜 이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지. 그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기존 작품들과의 차별성,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알파빌'이라는 영화는 미래라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보여지는 모습은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 1965년의 현실을 그리고 있어 현실과 미래가 모호하게 뒤섞이고, 연결되어 있는 듯한 작품이다. 하루키의 이 작품에서 어둠과 빛, 밤과 새벽,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교묘하게 섞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마다 종종 생각한다. 이건 마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것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궁금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어보라.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두께가 얇은 편에 속하지만,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가장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분명 당신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만나보길 바란다. 아마도 당신이 놓친 어떤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 새록새록 눈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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