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스토리콜렉터 34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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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건 매년 조사하는 연간 독서량만 봐도 알 수 있다. 성인 1인당 연간 독서량이 9.2, 0.76권이라고 하니 뭐, 점차 책을 읽을 만한 삶의 여유가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스마트 폰을 비롯해 다른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출판업계가 불황이라고 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틈에서 베스트셀러는 항상 나오는데, 작년 한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고, 올 여름은 그 자리를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가 차지했다. 노년의 주인공들이 소설 분야에서 갑자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재미있는 시점에, 이번에는 더 대단한 할머니가 등장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년들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겠다고 임산부에게 비키라고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 큰소리로 떠들거나, 관공서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앞질러 먼저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습들이라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백세의 알란, 쉰 아홉의 오베, 그리고 육십 대 초반의 폴리팩스 부인에 이르기까지 이들 캐릭터들은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걸로 그려진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걸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이 히트를 치고 있는 이 상황이 반가운 것 같다. 이들 책을 읽다 보면 현실에서도 이렇게 멋진 노년의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어쩐지 서글퍼진 부인은 일어서서 복도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아담한 체구에, 여성스럽고, 몸매는 포동포동하고, 머리카락은 거의 하얗게 셌고, 눈은 새파란, 작고 귀엽기는 해도 무슨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는 걸까? 내가 뜻밖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분야는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도 일단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폴리팩스 부인은 소심하게 내뱉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게다가 난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걸."

60대 중반이 된 평범한 할머니, 폴리팩스 부인은 어느 날 의사로부터 신체적인 건강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약간의 우울증 징후가 있어 걱정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갈수록 찾아오는 자식들도 드물고, 봉사활동을 많이 하지만 그것도 즐겁지 않고 말이다. 남편이 먼저 죽은 뒤로 혼자 몸으로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 그녀는, 그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의사는 말한다.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하신 일은 없느냐고.

"어렸을 때는 스파이가 되는 게 꿈이었지."

폴리팩스 부인의 대답은 60대 할머니가 꿈이라고 내뱉기엔, 누구에게나 푹.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허황되어 보이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스파이가 되고 싶었던 폴리팩스 부인의 꿈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뤄왔던 그 꿈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난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허공을 내디뎌서는 안 되는 이유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고,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어차피 살아야 하는 남은 인생이라면 뭐라도 변화가 필요했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상상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실행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지역구 의원을 만나고, 이후 버스에 올라 CIA 신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혹시 스파이 필요 없으신가?"

담당자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설마 진심이냐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너무도 진지하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말을 하는 할머니를 보고 그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스파이는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다른 용건이 생기자 급하게 자리를 피해 버린다. 그리고 담당자의 착오로,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임무를 맡게 된다. 활동하지 않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에 전형적인 미국인 관광객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정 날짜에, 특정 장소에서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전혀 요구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비밀요원이라 생김새가 딱 들어맞아야 했는데, 마침 너무도 우연히 폴리팩스 부인이 담당자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특별한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폴리팩스 부인은 그녀의 오랜 소원대로 스파이가 되어 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세뇌시킬 작정인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모욕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애도 낳고, 남편을 잃고, 병치레도 하는 등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도 존엄성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부인은 가치 있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외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죽을 정도로 말이다.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고작 날 죽이겠다는 것 말고는 들이댈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겁을 먹고 싶지는 않아. 어쨌든 난 숨길 게 없거든.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어. 난 스파이도 아니야. 스파이 임무에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이 끔찍한 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다 망쳐버리고 말았잖아.

특정한 날짜에 서점을 찾아가서 해야 하는 대사, 행동에 대해 숙지하고, 나머지 날짜에는 진짜 미국인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너무도 간단해 보이는 임무를 폴리팩스 부인이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 비밀 요원인 서점 주인이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보려고 하던 폴리팩스 부인은 그곳에서 그가 준 차를 마시고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임무 완수는커녕 함정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다시 깨어 났을 때 그녀는 알바니아의 감옥에 또 다른 비밀 요원과 함께 잡혀 있는 상황이다. 물론 스파이의 업무라는 것은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언제나 뒤따르게 마련이다. 문제는 폴리 팩스 부인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임무에 채용되다 보니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듣지 못했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그 어떤 훈련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생기발랄하고, 스파이 일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폴리팩스 부인이라 할 지라도 어쨌든 체력도 떨어지고, 약한 노부인이 아닌가.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 유쾌 발랄하다. 그녀는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도 않았거니와, 쉽게 굴복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파이 일을 하고 싶다며 자신은 애를 둘이나 키웠고, 운전도 잘하고, 응급처지도 할 줄 알며, 피를 봐도 겁 안 내고, 응급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난 편이라고 무대포로 천진난만하게 이 일에 뛰어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말이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폴리팩스 부인은 어느 순간 정말 '어른'처럼 보인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니 말이다. 너무도 명랑 발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엉뚱한 그녀라서 전형적인 모습의 스파이와는 한참 동떨어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스파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남들이 비웃을 수도 있는 자신의 오랜 꿈을 위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 앞에선, ‘나이가 많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은 절대 안 통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나도 언젠가 나이를 먹어 그 나이 즈음이 되었을 때, 그녀처럼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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