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지음, 문희경 옮김 / 테오리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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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은 너무도 크고 넓어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어도 아버지에게만 달려가면 모든 일이 문제없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든든했고, 믿음직스러웠고, 때로는 무섭기도 했으며, 가끔은 어려웠지만, 대부분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될 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작고 굽어진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져 가끔 서글퍼진다.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니까. 세월을 당하는 장사는 없으니까 말이다.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어깨며, 팔이며 조금씩 수척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도 오겠구나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 아래 보호 받았던 내가 이제는 반대로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에 책임감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 가족 중 그 누구와도 완전한 이별을 해본 적이 없기에, 언젠가는 겪게 될 아버지와의 이별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인 이 책을 읽는 내내 조금 두렵고, 긴장이 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인정하고, 익숙해져야 할 거라는 걸 알기에 말이다

아빠는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분명 아들과 같이 있는 이 잠시의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루퍼스는 구름다리를 다 내려올 무렵이면 이곳에 들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빠와 함께 바위에 앉아 있는 일이십 분 정도가 어찌나 행복한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말로든 생각으로든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그래 보이고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빠도 여기서는 다른 어느 곳과 달리 유독 만족스러워 보였다. 둘이 느끼는 만족감이 아주 비슷하고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가기 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제이는 아버지의 첫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매부리코에 잘 생긴 얼굴, 당당하고 위압적이던 검은색의 멋진 콧수염. 천성이 워낙 낙천적이고 심성이 따뜻했지만, 어머니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겼던,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제이가 분개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 창문 넘어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면서 그는 벌써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제이는 생각한다. , 누구나 언젠가는 가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다시 삶의 초점이 돌아오자 그는 외출 준비를 한다. 옷을 차려 입고 방을 나서려다 구겨진 침대를 보고는 아내의 자리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불을 위로 당겨 덮어둔다. 그리고 방문이 살짝 열린 아이들 방 앞을 지날 때는 깨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메리와 제이는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메리는 아빠가 인사도 없이 가면 아이들이 실망할 까봐 깨우고 싶은 걸 참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되면 생각보다 그가 더 오래 가족을 떠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메리는 바깥양반께서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걸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메리의 눈빛이 빛났다.

"감당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그저 최선을 다해 견디면서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저절로 풀리게 놔두렴. 그거면 충분해."

"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준비할 시간이 너무 적어요."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닌 것 같구나. 그냥 겪어 내야 할 일이지."

결국 그들은 사고 현장에 다녀온 오빠를 통해 제이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할 새 없이 그저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어 그저 견뎌내야 하게 되는 일들 말이다. 이제 남겨진 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만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메리는 종교에 의지하려 하지만, 믿음으로 충만한 자신에게 왜 이런 아픔이 왔는지 감당하기 어렵다. 죽음이 뭔지 아직 모르는 네 살 캐서린은 그저 아빠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여섯 살 루퍼스는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아빠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특히나 아빠와의 소중한 시간, 그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 루퍼스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저희 아이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세요." 엄마가 나직이 읊조렸다.

"은총을 내려 주시고 저희 모두를 지켜 주세요."

"아멘." 루퍼스가 예의 바르게 속삭였다.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엄마를 더 꼭 끌어안은 루퍼스는 엄마도 자기를 더 힘껏 끌어안는 느낌을 받았다. 그사이 서글프고 외로워진 캐서린은 돌처럼 딱딱하게 서있었다.

거짓의 아들과 거짓에 속은 엄마, 그리고 깊은 상처를 받은 딸이 그렇게 정물처럼 그 자리에 조용히 있었다.

이 책은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경험으로 그는 한 가족에게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견뎌내는 지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소설가 겸 시인으로서, 영화 비평가 겸 시나리오라이터로서, 르포라이터 겸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이 책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쏟아 부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게 되고 만 탓이다. 죽음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와 남겨진 이들에게 그저 견뎌내라고 말한다.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쌓은 작가답게 이 책들의 문장은 매우 공들여 읽고 싶을 만큼 단단하다.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부터 그날 저녁,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단 며칠 만에 이들 가족에게 벌어지는 상황과 심리들은 고스란히 감정을 따라가느라 몰입하게끔 매우 밀도가 높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하지만 비 종교인에게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스토리에 잘 녹아져 있고, 담담하고 정확한 문장들로 표현된 이들의 마음은 마치 내가 그들 가족의 일원이라고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언젠가는 나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더욱 차분해지고, 정돈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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