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심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어떤 작품은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며 숨가쁘게 읽을 수밖에 없고, 또 어떤 작품에선 천천히 배경을 둘러보면서 캐릭터들과 인사를 나누고 구석구석 꼭꼭 씹으면서 책을 읽는 그 순간을 오롯하게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죽은 자의 심판>은 명백히 후자이다. 그 말은 즉, 이 작품이 플롯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수많은 스릴러, 범죄 추리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나는 그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는 캐릭터를 이 작품에서 만났다. 바로 주인공인 아담스베르그 서장이다.

"내 형사들 중에는 말입니다, 대위님.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드는 수면 과다 환자도 있고, 어류 특히 민물어류에 빠삭한 동물학자도 있습니다. 비상식량을 사러 슬그머니 사라지는 허기증 환자가 있는가 하면, 동화와 전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늙은 왜가리를 닮은 친구도 있고, 백포도주를 입에 달고 사는 천재도 있어요. 다들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 서로 격식을 차리기가 힘들죠."

"그런데도 일이 됩니까?"

"아주 열심히들 합니다."

명백한 사실에 입각한 증거와 논리로 무장해 범인을 찾아야 할 강력계 형사인 그는 무엇보다 본인의 감을 명백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형사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상관없이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땅딸막하고 수수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용의자를 빼돌려 숨기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 하기도 하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사건 관계자를 만나러 가서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욕구를 가져 보기도 하는 등... 아무리 보아도 전혀 주인공 스럽지 않은 인물이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인간적이고, 강력계 형사라고 하기엔 심각한 결함마저 가진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당글라르는 그의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사고와 일관성 없고 총괄적이지 못한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견딜 수 없어 했고, 형사들은 세월아 네월아 마냥 여유를 부리는 서장에게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한다. 청장은 그의 수사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며, 수사 방향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도 없는 그의 방식이 윗사람한테나 아랫사람한테나 감을 잡기 어려운 추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를 처음 만난 에므리는 그가 유명한 이름과 걸맞지 않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는 표준을 벗어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가 숨어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사.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천재적인 수사 감각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멋진 인물도 아닌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의 이성적인 머리는 주어진 정보로 그를 객관적으로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내 감성적인 머리에서는 어느 순간 마치 홀린 듯 그에게 점점 사로잡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또 다른 등장 인물이 등장할 때는 남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그에게 연민마저 느낄 정도로 말이다.

"에르비에의 죽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리나의 꿈이 현실에서 폭발한 겁니다. 꿈이 배고픈 늑대를 숲 속에서 나오게 한 거랄까요."

"엘르켕 두령이 희생자들을 지목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희생자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리나가 본 환영이 살인자를 만들어낸 거라고?"

"단순히 환영만은 아닙니다. 천 년에 걸쳐 오르드벡 구석구석에 스며든 전설이죠. 제가 장담하는데, 마을 사람들 중 4분의 3 이상은 죽은 기마병들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을 겁니다."

이상한 캐릭터만큼이나 이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 또한 매우 기묘하다. 21세기에 나타난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라니, 어쩐지 믿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 사기꾼, 영혼이 썩은 사람, 착취자, 부패한 재판관, 살인자들을 성남 군대가 직접 나서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배경은 현대의 파리인데, 중세의 유령부대가 사람들을 죽일 거라고 예고를 하고, 그들을 강력계 형사들이 수사한다는 발상 자체부터 낯설기만 했다. 아담스베르그가 처음 '성난 군대'에 관해 제보를 받았을 때 "단체 이름입니까? 사냥 동호회 같은?"이라고 반응한 것처럼 말이다. 성난 군대에 관한 전설을 전혀 몰랐던 그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을 때 "별난 군대라고 들어봤니?"라고 할 정도니 뭐. 1777년의 중세 유령부대가 출몰한다는 21세기 노르망디의 본느발 숲. 아담스베르그는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데도, 당장 코앞에 닥친 다른 살인사건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시간에 그곳으로 직접 가본다. 이유 또한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다. 그가 그곳에 간 건 성난 군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도전 의지 때문이라니 말이다.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가 등장하니 고딕 소설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재미있게도 너무도 현실적인 현재의 사건들과 적절하게 병행이 되어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과학 수사와 초자연적인 범행이라는 어려운 조합은 중세 시대 동물 유해 전문 고고학자라는 이력을 지닌 바르가스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하게 흘러가지 않고, 그럴 듯한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리고 성난 군대와 별개로 벌어지는 사건 들도 매우 흥미롭다. 잔소리가 심한 아내의 목에 빵 속살을 처넣어 질식사를 시킨 노인이 있는가 하면, 주스 병으로 종조부의 머리를 때리고 달아난 여덟 살 여자아이도 있고, 비둘기 다리를 묶어놓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게 만드는 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재력가가 자동차에서 불에 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평소에도 방화를 일삼는 용의자에게 혐의가 집중되지만, 그의 결백을 믿는 아담스베르그는 진범을 잡기 전까지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까지 한다.

나는 명성으로만 듣던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했던 점은 그녀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꼭 내가 그 인물을 잘 알고 있고 어디선가 만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한 아담스베르그 서장 외에도 강력반 식구들 또한 그 못지 않게 개성이 넘친다. 동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거구의 여장부, 모르는 게 없는 만물박사, 음식을 잔뜩 쌓아두어야만 안심이 되는 이도 있고, 수면과다 환자에 말끝마다 고전 시를 읊어대는 경위까지... 하나같이 독특하고,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순간 거리 어디선가 걸어 다니는 그들을 알아볼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그녀의 작품들이 모두 절판에 품절 상태라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을 통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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