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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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 가사부 판사 피오나 메이는 35년 동안 한눈 한번 판 적 없던 남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여전히 피오나를 사랑하지만, 일에만 신경 쓰느라 성생활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지쳤다며 죽기 전에 흥분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연애를 해보겠다고 말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녀는 충격이 크다. 피오나의 나이 59, 수많은 부부간의 갈등을 재판해왔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갈등을 겪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일 정도로 업무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죽 하면 남편이 "피오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게 언제지?"라고 물었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언제였을까? 그제야 기억난다. 남편은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는 걸. 처량하게 묻기도 했고 따지듯 묻기도 했었다. 오랜 시간 타인의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조언하고, 판단하고, 결정했던 그녀가 그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녀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그녀가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을 그 즈음, 한 소년의 생사가 걸린 재판을 맡게 된다.

"난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안 그래?"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야."

"우리 결혼을 깨트리려는 건 내가 아니야."

"그건 당신 말이지."

18세가 되기까지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17세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긴급 수혈을 해야 하는데 아이와 부모가 동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유는 아이와 그의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혈액제제를 몸 안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상황은 수혈을 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고,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문제는 죽음의 방식이다. 내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신부전의 가능성도 있고, 시력을 잃거나 뇌졸중을 일으키거나 합병증으로 무수한 신경질환을 앓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끔찍한 죽음이 되리라는 사실뿐. 당연히 병원에서는 왜 수혈을 하지 않아 환자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병원 측은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반해 적법한 절차로 수혈할 수 있도록 법원명령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지만, 문제는 애덤이 아직 법률상 성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3개월만 지나면 18세로 법률상 성인이 되지만, 아이의 견해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부모의 견해가 아닌지,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를 근거로 수혈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견해가 맞는지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수혈을 못 하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고, 피오나는 양측의 공방과 부모의 입장 만으로는 이 특별한 상황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직접 애덤을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병원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살릴 수 있도록 수혈을 통해 치료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극중 피오나가 읽어내는 판결문은 너무도 정확하면서 아름다워 페이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이크를 먹고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속담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우리 경우에는 케이크를 먹어버렸는데도 아직도 손에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부모님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장로님들 말에도 순종했고, 옳은 일은 모두 했으니까 지상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동시에 아들도 살렸잖아요. 가족 누구도 회중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수혈을 받긴 했는데 우리 잘못은 아닌 거죠! 판사를 비난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체제를 비난하고, 우리가 가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난하라는 거죠. 이런 구제방법이 있었다니! 아들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아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아들이 바로 케이크인 거고요!

, 이 작품이 정말 흥미로운 건 여기까지가 작품의 중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로 애덤이 수혈을 받게 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가족들이 의외로 아들이 회복되는 모습에 기뻐하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와 버렸고, 그에 대한 판결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피오나가 애덤을 살리는 판결을 하고 난 뒤, 상황은 전..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작품의 후반부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것들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고 자신했던 바로 그곳에서 함정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보여지는 종교의 법의 충돌, 개인의 가치관과 생명의 무게, 그리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실제 사례들에 대한 스토리 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진정한 장기는 후반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법이라는 너무도 정..한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온 한 여인이 어떻게 낯선 삶 속으로 던져 지게 되는지, 삶이란 매 순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글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몇 해전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자신의 부인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보험사에 보험금을 요구했고, 보험사측은 살 수 있는 환자를 그렇게 죽게 만든 것은 남편의 책임이니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고, 결국 재판까지 갔으나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이 났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 종교에서는 수혈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거부하다 죽는 경우도, 군입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의 아동법과 개인의 자유인 종교적 신념에 관해 매우 치밀하게 잘 짜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역시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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