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개월 전에 은퇴한 형사 호지스는 여느 때처럼 무기력하게 저질 티비 토크쇼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평일 오후마다 아버지가 순찰경관 시절에 들고 다녔던 총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몇 번씩 들어서 유심히 쳐다본다. 그리고 가끔 장전된 총을 입 안에 넣고 겨누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넣어보기도 한다. 아마도 별다른 일 없이 몇 개월이 더 지난다면, 대부분의 퇴직 경찰들이 권총과 배지가 없으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하는 것처럼 호지스의 삶도 그렇게 끝났을 지도 모른다. 부인과는 한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이혼했고, 다 큰 딸은 멀리 떨어져 살고, 그에겐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가끔 정원 손질이며 컴퓨터를 고쳐주곤 하는 흑인 청년 제롬이 있고, 전화하면 그를 반길 옛 동료들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지금 현재 혼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발신인 주소가 없는 편지가 도착한다. 친애하는 호지스 형사에게. 라는 제목으로.

...지금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체포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겠지. 나는 사실 언론에서

a)조커

b)피에로

아니면

c) 메르세데스 살인마

로 불렸던 인물이야.

나는 맨 마지막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들지만!

당신은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내 입장이 아니라 당신 입장에서) 실패했지.

그 편지는 그가 퇴직 전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 중 하나였던, 메르세데스 살인마가 보낸 것이었다. 그 사건은 작년 시티 센터 채용박람회 참석자들 사이로 차를 몰고 돌진해서 여덟 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남겼었다. 범인이 호지스에게 연락을 하게 된 이유는, 도시 역사상 가장 엄청난 흉악범을 잡지도 못했는데 경찰에서 파티까지 열어주며 명예롭게 은퇴한 것이 그의 신경을 긁었던 것이다. 그는 늙고 뒤룩뒤룩 살이 찐 퇴직 형사가 자신의 편지를 받고 자책과 무기력함에 자살하기를 바랬지만, 호지스는 오히려 그의 편지 덕분에 당분간 살아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

8주 일하고 4 5000달러라니. 호지스는 감탄한다. 결국 필립 말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문을 열면 싸구려 사무용 건물 3층 복도가 나오는, 추레한 방 두 개짜리 사무실을 상상해 본다. 이름이 롤라 아니면 벨마, 뭐 이런 섹시한 접수 담당자도 두는 거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입이 거친 금발이어야 한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갈색 페도라를 한쪽 눈썹까지 눌러쓸 것이다.

웃기는 상상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구미가 당긴다.

극중 호지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몇 번 언급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다. 늙고 지친 퇴직 형사가 미제 사건에 도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스타일은 정통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호지스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바로 다음 장면에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독자에게 범인을 오픈 하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두고 보겠다는 거다. 게다가 범인의 일상, 어린 시절, 가족관계, 심리 상태 등등이 거의 호지스 만큼의 비중으로 전개되어 동등하게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특히나 언더 데비스 블루 엄브렐라라는 채팅 사이트를 통해 두 사람이 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패를 보여주고, 미끼를 놓고, 걸려들고 하는 심리 싸움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스티븐 킹 특유의 유머 감각도 여전하다. <내가 알츠하이머 특급열차를 타고 치매의 왕국으로 달리는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겠군> 이라든지, <호지스가 함박웃음을 짓자 주름살이 펴지면서 미남에 가까워진다> 또는, <그녀는 좋아할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반짝이는 재치 한 조각, 은근한 분위기 한 자락 없다>, <호지스는 거짓말을 아주 그럴 듯하게 할 수 있는 경찰 특유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홀리."> 등등... 구성은 탄탄하고, 문장은 허투루 흘려 버릴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다. 플롯은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캐릭터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는 전화를 끄고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드린다. 그 우라질 사이코를 누가 잡든 상관없다고 자신을 달래지만 사실은 상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그 perk(perk라는 단어가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박히다니 우스운 일이다.)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분명 공개될 테니 그러면 그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뭔가 하면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사라지면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 내내 텔레비전을 보며 아버지의 총을 만지작거렸던 날들로.

사실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작가라 새로운 장르에서도 마치 그 동안 자신이 놀아온 무대인 양 종횡무진 달려간다. 애초에 스티븐 킹의 필력을 장르의 틀로 규격화시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40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이 주종목인 공포 소설을 비롯하여 판타지와 SF에까지 영역이 확장되어 있었긴 해도, 탐정 추리소설 장르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호러의 제왕이라 불리던 그가 첫 번째 하드보일드 작품으로 올해 에드거 상을 받았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는 무림의 고수, 올림픽 메달리스트, 소설계의 장인인데 말이다.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작가라 새로운 장르에서도 마치 그 동안 자신이 놀아온 무대인 양 종횡무진 달려간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600페이지까지의 호흡도 어느새 금방 끝나 버리고 만다.

이 작품은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 중이고, 최근 후속작인 <파인더스 키퍼스>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스티븐 킹은 탐정 호지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총3부작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다음 시리즈도 국내에 빨리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