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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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을 이미 두 작품이나 읽었다. 로맹가리의 <유럽의 교육>과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 세상에서>이다. 전자는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독일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빨치산들의 이야기인데 열네 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야네크는 음악을 듣고 감동할 줄 아는 소년이었다. 후자는 1941년 리투아니아를 배경으로 스탈린 지배하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가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열다섯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리나는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마음을 빼앗기는 소녀였다.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944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탄광 도시를 배경으로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열여섯 장님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원에서 여동생과 함께 사는 열여덟 소년 베르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침략국인 독일의 탄광촌에 있는 고아원, 그리고 피해국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박물관을 주요 배경으로 전쟁의 막바지인 1944, 그리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1934년의 시간이 교차되어 그려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두 주인공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1권에서는 아예 서로를 모르고, 2권도 중반이 지나서야 겨우 만나게 된다는 것. 그들의 인연은 단 한번 짧게 만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명백히 보여주는데, 바로 스토리보다 문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시작할 때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작품을 이미 만나보았다고 썼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자,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묘사는 마치 그림처럼 선명하고, 대사는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고, 다양한 비유들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모두 빛이 난다. 시적인 비유로 가득한 문장들은 그저 그 자체로 너무도 아....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된 마리로르. 그녀는 아버지를 색깔로 기억한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모든 것엔 색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팔색, 빨간 딸기색, 짙은 황갈색, 야성의 초록색 등등, 1000가지 짙은 색을 뿜어낸다. 그리고 기름과 쇠 냄새, 자물쇠 날름쇠가 미끄러져 열리는 느낌, 걸을 때 짤랑이는 열쇠고리 소리가 난다. 아버지는 부서장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올리브의 초록색이며, 온실의 플뢰리 양에게 말할 땐 점차 채도가 높아져 가는 오렌지색이고, 요리를 하려 할 땐 선명한 빨간색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대에 앉을 때는 사파이어 빛을 발하고, 일을 하면서 들릴락 말락 콧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피우는 담배 끝에서 프리즘의 파란 불빛이 번쩍인다.

나는 그 어떤 작품에서도 이런 문장들을 본 적이 없다. , 눈을 감고 이 문장들을 떠올려보자. 올리브의 초록색, 채도가 높아져 가는 오렌지색, 선명한 빨간색, 사파이어 빛, 프리즘의 파란 불빛.... 눈앞에서 물감으로 채색을 하듯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다. 베르너가 쓰레기장에서 고장난 라디오를 가져와 고쳐서 여동생 유타와 새벽까지 몰래 방송을 듣는 장면은 이렇다. 낯설고 생경한 언어들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러시아어인지, 헝가리어인지를 듣다가 영국의 뉴스 방송을 듣다가 프랑스어로 빛에 관해 이야기하는 채널을 찾아낸다. 주파수에서 칙칙, 팍팍 소리가 나는 와중에 마치 벨벳 같다고 생각한 프랑스 남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시간이 느려진다. 다락방이 사라진다. 유타가 사라진다. 베르너가 제일 알고 싶은 것을 정확히 집어 내서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 준 사람이 이제껏 있었던가?

"눈을 떠요" 그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그리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쓸쓸한 노래를 연주한다. 베르너에겐 그 노래가 어두운 강을 떠도는 황금 배처럼, 졸페라인을 아름답게 바꾸어 주는 화음의 흐름으로 들린다. 집들이 안개로 바뀌고, 탄갱 속이 채워지며, 공장의 높은 굴뚝들이 떨어지고, 태고의 바다가 거리마다 스며들며, 공기가 가능성을 담고 흐른다.

심야 라디오의 매력을 이렇게 매혹적으로 그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멋진 장면이다. 나도 새벽에 심야 방송을 찾아 듣던 감수성 풍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전국의 무수한 청취자들을 향해 말을 하고 있는 걸 텐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나 혼자만을 위한 방송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목소리가 친구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자신이 외롭다는 말이다. 베르너와 유타가 듣던 낯선 언어의 방송 또한 그들에게는 마치 친구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방송을 들으면서, 그 목소리에 빠져서 자신이 현재 있는 공간마저 지워버린다고 표현된 대목은 이 작품에서 라디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르너가 듣던 피아노 소리와 유타가 듣던 피아노 소리는 똑같이 체감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라디오는, 음악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들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기억되는 장치이니 말이다.

탄광촌에 있던 소년들은 독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15세가 되면 탄광에서 일해야 한다. 베르너는 탄광에서 아버지를 잃었기에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는 라디오 조립에 재능을 보여 사람들의 고장 난 라디오를 고쳐주다 나치의 눈에 띄어, 탄광촌에 가는 대신 청년 정치 교육원에 입학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선생의 총애를 받기도 하지만, 비인간적인 교육 방식과 잔인함은 유일한 친구인 프레데리크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진다.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베르너와 조류 연구가가 되고 싶다던 프레데리크. 우리가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다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베르너에게 프레데리크가 말한다. "네 문제는, 베르너, 넌 아직도 너만의 인생이 있다고 믿는 거야." 그런 시대였다. 개인이 뭘 원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이념의 시대. 그런데 그 속에서 한 소년이 부여잡고 있는 희망이라니. 오랑주에 피난 온 누군가가 이브리쉬르센에서 짐과 함께 남겨 두고 떠난 세 자녀를 찾고 있다. 오르세 역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내를 찾고 있는 남편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안전하게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하고자 한다. 기차에 태운 여섯 딸의 행방을 찾고 있는 어머니도 있었다. 그렇게 다들 엉뚱한 데서 사람들을 잃어버렸던 그런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참 용감해요."

그녀가 양동이를 내린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로르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박물관에는 전설의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라는 게 있다. 전쟁이 본격화되고 피난길에 오를 때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세 개의 진품 혹은 모조품 중에 하나를 소장하게 된다. 그들은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러다 잠시 파리로 가려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마리로르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전설의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는 나치의 협력자 룸펠이 끈질기게 추적해오고, 마리로느는 라디오를 통해 자신이 즐겨 읽던 책 해저 2만 리를 읽어주며 자신을 도와 달라는 비밀 메세지를 함께 송출한다. 교육원에 있다 선생이 그의 나이를 조작하는 바람에 전쟁 현장에 투입되어 곳곳을 떠돌던 베르너가 우연히 그 라디오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같은 도시에 머물게 된다.

사실 스토리 자체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오로지 문장의 힘으로 모든 걸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전쟁이라는 걸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고, 아마 죽기 전에 그 비슷한 경험 조차 해볼 일이 없을 나 같은 독자들이라면 전쟁을 둘러싼 이들의 삶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의 삶도, 고아원에서부터 나치의 비인간적인 교육장과 전쟁 현장까지 여러 상황을 참아내야 했던 소년의 삶도, 전쟁이 만들어낸 누군가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빛을 본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고, 자기 자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비극적인 상황들과 끔찍한 일들이 태연히 자행되는 배경 속에서도 이들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빛나 보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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