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아이 고 - 내 남편의 아내가 되어줄래요
콜린 오클리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 사람의 장점 때문이고, 살아가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단점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 부족한 면을 아는 건 함께 살아가는 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사랑의 마지막 단계는 '이런 사람을 나 아닌 누가 참아줄까','이런 사람이지만 나니까 이해하고 포용하는 거지'의 단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단계까지 이르게 되려면 결혼을 하거나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들처럼, 삶이 그들을 갈라놓을지라도 서로 못 견디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야만 한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말이다.

지난 4년 동안 바로 이 순간을 피하려고 해온 모든 일을 나열해본다. 요가를 했다. 나는 요가를 싫어한다. 인류가 아는 모든 채소를 굽고, 데치고, 삶고, 볶았다. 나는 채소를 싫어한다. 숨쉬기 운동. 대략 1,467컵의 스무디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략 1,467컵의 스무디를 마셨다. 블루베리를 먹었다. 석류를 먹었다. 녹차를 마셨다. 적포도주를 마셨다. 피시 오일을 먹었다. 코엔자임 Q10을 먹었다. 흑사병을 피하듯 간접 흡연을 피했다.

그랬는데도 이렇게 되었다.

현재 대학원에서 상담 전공 석사과정을 하고 있는 데이지는 4년 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아 수술과 화학치료, 방사선 치료를 거치고 6개월마다 혈액 검사를 해오며 깨끗하다는 결과를 받아서 암이 치료되었다고 믿었다. 1년 전 마지막 혈액 검사를 받고는 암 치료 3주년 파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발인 것 같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됐다고, 간에도, 폐에도, 뼈에도 심지어 뇌 뒤쪽에도 오렌지 크기의 종양이 있다고 말이다. 종양 위치가 좋아 쉽게 제거를 할 수는 있지만, 치료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단지 상황을 연기시킬 수 있다고. 4기의 생존율은 20프로, 그러니 대략 4개월에서 6개월이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라고.

대체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두 번이나 암에 걸리다니!

그건 번개를 두 번 맞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 아닐까?

죽음이란 나이 든 노인이나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프리카의 아이들, 자전거를 타고 재수 없는 시각, 재수 없는 교차로를 지나다 차에 치이는 아빠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지려 하고, 날씬하고 건강하고 아픈 데도 없는 스물일곱 살 여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마치 레스토랑에 갔는데 웨이터가 엉뚱한 요리를 가져온 것 같다. 죽는다고? 아니, 분명 뭔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건 주문하지 않았다.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4개월이나 6개월이나 1년이라면 그 기간 동안 무얼 해야 할까? 만약 특별히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다면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여행을 가보거나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거나,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거나, 자식이 있거나, 아니면 모시던 부모님이 계실 경우에는 내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그들에게 쓰고 싶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내가 떠나면 그들은 홀로 남겨져 나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은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비디오 사용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이런 행동이 사실 자신이 없을 때 남겨진 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죽음의 잔인함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가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외출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가기 전에 남편에게 이것 저것 일러둘 게 너무나 많다. 냉장고에는 뭐가 있고, 이건 어떻게 데워 먹으면 되고, 아이 이유식은 언제 주고, 모유 유축 해놓은 건 어떻게 하면 되고.... 등등등... 단 몇 시간 자리를 비워도 이런데, 평생 남편과 아이 곁을 떠나게 되었다면 어떨까. 내가 없는 빈자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냉장고에도, 안방에도 필요한 일들 목록을 좍 뽑아서 붙여놓고, 그래도 부족해 며칠을 일러두고, 설명해두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질 않을 것이다. 그가 혼자 남으면 집이 어떻게 될까. 또 아이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게 될 것 같다. 떠나야 하는 나보다, 남겨져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더 불행해 질 까봐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 작품의 설정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으니 말이다.

"잭의 아내를 찾고 있어."

케일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나는 케일리가 제대로 들었는지 궁금하다. 다시 말해줘야 하는 걸까. 대신, 준비도 제대로 못한 설명을 시작한다. "나중에...... 내가......" 내겐 그처럼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이 꼬인다. 이렇게 정리한다. "잭이 잘 지내게 해주고 싶어."

데이지는 자신이 없으면 혼자 남겨질 남편 잭을 생각해 본다.

내가 죽으면 누가 그 양말을 치워줄까?

내가 죽으면 누가 잭의 어깻죽지 바로 아래를 긁어줄까?

내가 죽고 나면 누가 창문 틈을 막아주고..... 장을 보러 가고, 침대 정리를 하고, 잭이 매번 식사로 망할 시리얼을 먹지 않도록 해줄까?

그녀는 생각만으로 공포에 질려 벌떡 일어나 앉는다. 자신은 죽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잭은 어떻게 되는 걸까? 데이지는 잭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뜻한 사람.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더러운 양말을 치워줄,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잭의 아내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남편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을 현재의 아내가 찾는다. 어찌 보면 현재의 아내만큼 남편에 대해 샅샅이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건 그럴듯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가 뭘 싫어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니까 말이다. 그에 맞추어 그가 좋아할 만한 여자, 그의 단점도 수용해줄 수 있을 만한 여자를 찾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렇게 딱 맞는 여자를 찾았을 때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내가 찾아낸 여자가, 내가 없는 미래를 함께 할 거라는 사실에 대해 수용하는 것은 머릿속으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이 작품이 진짜 재미있어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부터이다. 데이지가 잭의 아내로 찾겠다고 선언한 전반부가 아니라, 잭의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을 찾고 난 다음 말이다. 내가 죽더라도 당신 만은 행복해야 해.가 사랑의 극강 멘트 같지만 현실성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없어도 당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를 절대 잊으면 안돼.라고 말하지는 못할 망정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 나는 잊어버리고 행복해야 해.라고 한다는 건 정말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판타지 아닌가.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의 판타지나 죽을 병에 걸린 아내에 대한 흔해빠진 신파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드라마를 그려내고 있다.

잭이 나를, 진짜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예쁜 나를, 강하고 능력 있는 나를, 그가 사랑에 빠졌던 나를.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데이지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우리는 데이지가 암이 재발했을 때 가졌을 심정부터, 잭의 아내를 찾게 된 계기,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질투와 절망과 안타까움 등등의 복잡한 심경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단 한번 화자가 바뀐다. 데이지가 아닌 잭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마지막 이야기는 짧은 만큼 임팩트가 강한 울림을 남겨준다. 자신이 퉁퉁 부은 채 볼썽사나운 꼴로 누워 있는 것을 보이기 싫어서 수술을 할 때 잭이 오지 않기를 바랬던 소녀 같았던 데이지 만큼이나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의 예쁜 마음이 잔잔하게 마음에 파도 친다.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우리는 이런 사랑에 빠진다. 나보다 상대가 더 중요한, 나만큼이나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올 여름 가장 완벽한 사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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