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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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퍼 리의 작품이 오로지 <앵무새 죽이기> 단 한 편인 줄 알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사실 그녀의 첫 작품은 <파수꾼>이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작중 인물인 진 루이즈의 아버지 애티커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했고, 그래서 그녀는 스카웃이라는 어린이의 일인칭 목소리로 소설을 다시 썼고, 그것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가 된다. 인기와 명성을 바라지 않았던 그녀는 이 작품의 너무나도 큰 성공으로 인해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기에,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녀의 작품은 단 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변호사에 의해 이 원고가 발견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파수꾼>이 세상과 드디어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자 후속작이며, 하퍼 리의 첫 작품이자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와 이어지는 이야기이면서도 소소한 설정 상의 차이가 있어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흑인 청년에 대한 유죄가 무죄로 바뀌고, 손자가 아들로, 여동생이 누나로 바뀌고, 가장 중요한 아버지 애티커스의 가치관이 다르게 보여져 살짝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이 두 작품을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기도 하다.

진 루이즈가 생각할 수만 있었더라면, 아주 옛날부터 있던 돌고 도는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관련된 중요 사건은 2백 년 전에 시작되어 현대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과 가장 가혹한 평화도 파괴시키지 못한 당당한 사회에서 펼쳐졌고, 이제는 어떤 전쟁도 평화도 구할 수 없을 문명의 황혼기로 되돌아와 개인의 장에서 다시 펼쳐질 참이었다.

흑인 인권 운동의 움직임이 크게 일렁이던 1950년대 중반, 뉴욕에 거주하던 스카웃은 고향인 메이콤으로 돌아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된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정의'에 대해서 그녀가 아빠와 맞서는 대목이다.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야. 지금까지 그렇지 않다고 나를 설득시킨 주장을 들어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애티커스라니,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한 일이지 않나. 전작에서 오누이의 영웅이었던 아버지 애티커스는 미국 전체의 상징적인 멋진 백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흑인들에게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백인들처럼 그려지고 있다. 루이즈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서 배신감마저 느끼고 당혹스러움과 실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전작이 어린이의 시점으로 쓰여진 3인칭 소설이라 당시 스카웃의 눈을 통해서 본 아버지는 영웅이었기에 결점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뭐 이번 작품에서의 설정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아이들은 보이는 그대로를 고스란히 믿지만, 사실 어른들의 모습은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많은 부분을 전작에 기대고 있지만, 또 많은 부분이 전작에서 벗어나 있어 재미있다. 게다가 전작에서 우리의 어린 주인공이 그랬듯, 20대가 된 주인공도 역시나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빙긋이 웃게 만들어준다. 루이즈가 열두 살 때, 자신이 임신한 줄 알고 불안해하던 에피소드는 사실 너무도 귀엽다. <앨버트는 진 루이즈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진 루이즈는 임신했다> 친구들을 통해 결혼하지 않아도 생리를 시작한 뒤로는 아기 낳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녀는 자신이 정말 임신을 했다고 믿었다. 무려 10개월 동안이나. 매일 아침 갓난아기가 나왔는지 찾아보았고, 계산해 봤을 때 아기가 10월에 나올 예정이었으니, 자신은 9 30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되겠거니 했다. 그러다 읍내의 물탱크에 뛰어 들려고 하던 때, 헨리가 그녀를 붙들고 뭐 때문에 그리 속상한 거냐는 그의 물음에 <나 아기를 낳게 됐어!> 라고 말하는 순간은 픽 웃음마저 나온다. 그녀의 무지와 지나친 순수함이 너무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거나, 그게 내 모습이다. 나는 눈을 뜬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다. 얼굴만 살짝 봤을 뿐이다. 완전히 눈이 멀었다, 돌처럼... 스톤 목사. 스톤 목사는 어제 예배에 파수꾼을 세웠다. 그는 내게 파수꾼을 세워 주었어야 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데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파수꾼> <앵무새 죽이기>의 초석과도 같은 작품으로,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인 진 루이즈 핀치(스카웃) 20대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고 작품 소개 문구가 있는데 사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 중의 많은 부분이 <앵무새 죽이기>에서 나온다. 사실 이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였으나 안에 담긴 내용은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앵무새 죽이기>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만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그다지 부담을 갖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9살이던 주인공은 이제 26살이 되었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던 초등학생은 지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하퍼 리의 두 작품은 당시의 추억과 새로운 깨달음도 함께 안겨 주었다. 어린 나의 시선과 어른이 된 나의 시선은 분명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날 테지만, 좋은 책이란 그런 것 같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어른이 된 시점에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그런 책을 만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 올해 나는 이 두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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