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이반 레필라 지음, 정창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우물 밖에서는 공전을 계속하던 해가 서서히 산맥 뒤로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우물 속에서 창백한 얼굴과 눈과 이를 드러내게 하던 빛의 커튼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형은 울퉁불퉁한 흙벽에 계단을 만드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손가락을 바지춤에 걸고서 대낮의 끄트머리로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수수께끼의 답을 찾듯 어떤 생각에 집중한다. 서서히 어둠이 깔린다.

숲 한복판에 깊이가 7미터 정도 되는 우물, 사방이 축축한 흙과 뿌리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벽, 우물 바닥의 시커먼 물 웅덩이, 그 속에 어린 두 형제가 갇혀 있다. 물도, 식량도 없고, 구조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 나갈까. 형은 축축한 벽을 손으로 파헤쳐 계단 모양의 디딤판을 만들어보지만 번번히 허물어진다. 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싸 상처 부위에 입 바람을 불며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무래도 불가능해. 하지만 꼭 빠져나가고 말 거야."

엄마의 가방 속에는 빵 덩어리 하나와 말린 토마토 몇 개, 무화과 몇 개, 치즈 한 조각이 들어 있다. 하지만 형은 엄마 거엔 손대지 말라며 우물 안에서 먹을 것들을 구해 동생에게 건넨다. 손으로 짓누른 개미와 퍼런 달팽이, 이름도 모르는 조그맣고 누런 벌레, 보드라운 뿌리, 깨알만 한 유충을. 그렇게 우물 속에서 여러 날이 흘러간다. 형은 틈만 나면 운동을 한다. 팔 굽혀 펴기, 앉았다 일어나기, 윗몸 일으키기..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동생은 계속 꿈속을 헤매며 배고픔에 지쳐간다. 비가 내리지 않아 나흘째 물 한 방울 구하지 못하자, 탈수 증상까지 생기며 오줌까지 말라붙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상상을, 꿈을 꾸며 갈증과 굶주림에 죽어간다. 그 즈음 폭풍우가 몰아쳐 그들을 살리지만, 폭우는 이틀이나 퍼부어 우물은 습지로 변해버린다. 습기에 노출된 옷이 썩고, 동생은 고온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형은 그럼 동생에게 몸을 비벼주고, 안아준다. 

동생은 아무 때나 묻는다.

"우리가 왜 여기 있지?"

"세상이 이런 거야?"

"우리가 진짜 어린애야?"

형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동생은 차츰 죽어가고, 형은 죽어가는 동생의 목숨을 지키고 있다. 죽음의 놀이에 홀린 아이들처럼. 그런데 대체 이들은 왜 이 우물 안에 갇히게 된 걸까. 왜 우물 바깥에 있는 그들의 부모는 그들을 찾지 않는 걸까. 이들은 과연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될까. 누군가 이들을 구해내 줄까. 그때까지 이들이 우물 속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

여러 날이 지나고 동생의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고, 기침도, 가래도 멎어 총기가 되살아나고, 기력도 회복이 되지만 고열이 남긴 후유증이 심각하다.

"여기가 어디야" 동생은 주위를 둘러본다.

그 모습이 흡사 어린애를 먹어 치운, 수천 년의 광기에 점염된 어른 같다.

형은 동생에게 분노와 평정, 의지에 대해 가르친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분노가 필요하고 그걸 표출시키기 위해선 사흘을 견뎌야 한다고. 그리하여 죽임의 날에는 민첩하고 잔혹하고, 정정당당하게 해치워야 한다고.

중반 이후에 밝혀지는 그들이 우물에 갇히게 된 이유는 충격적이지만, 작품의 후반 동생을 살리기 위한 형의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여지는 결말은 더 놀랍도록 섬뜩하다. 에스파냐의사무엘 베케트로 불리는이반 레필라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묵직한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마치 우화처럼 읽힌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에 관해 창작된 작품들은 그 동안도 다소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적인 내용보다는 은유로 스토리에 녹여내어 쉽지만, 어렵게도 느껴진다. 고난을 통해 어린 소년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과 그들의 형제애가 보여지다가도,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에 대한 복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가볍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만 막판에 벌어지는 상황은 꽤나 충격적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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