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은 필요 없다
베른하르트 아이히너 지음, 송소민 옮김 / 책뜨락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하얀 캐딜락. 천천히 우아하게. 하얀 옷을 입은 노부인이 조심스럽게 승객을 모시고 간다. 검은색이 아닌 흰색. 죽음이 아닌 삶. 블룸은 색다르고 싶었다. 경쟁자 장의사들과 차별화되기를 원했다. 하얀 장의차는 완전히 도발이었다. 블룸의 동료 장의사들의 눈에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았다. 애도는 예전부터 항상 검은색이었다.

블룸은 자신의 양부모가 죽던 날, 배에서 운명처럼 만난 남자 마르크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된 지 8, 이제는 두 아이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여자이지만 장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남편 마르크는 경찰이다. 2년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마르크의 아버지 칼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이자 그들의 든든한 가족이다. <분노, 갈등, 슬픔 이런 것은 전혀 없다. 행복하기만 하다. 고통도 없고, 성가시게 구는 고객도 없다. 오늘 아침, 아이들을 말을 잘 듣는다. 블룸에겐 걱정거리가 전혀 없다. 기분 좋은 하루다> 블룸과 마르크는 서로에게 항상 곁에 있어주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게 여전히 설레는 멋진 부부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 마르크에게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블룸은 알지만, 그들은 각자 서로의 일을 집안으로 가져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경찰이 하는 일과 장의사가 하는 일이란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닐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 날,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일터로 가는 마르크의 모습을 보며 손짓으로 인사하던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난다. 커다란 SUV 차량이 순식간에 마르크를 치고 쏜살같이 떠나버린다. <사고. 아스팔트 위에 망가진 오토바이. 축 늘어진 육체. 육체는 바닥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없다. 거기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엄청난 굉음을 냈던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작스런 사고로 마르크가 그녀의 눈 앞에서 세상을 떠나 버린다.

덱스터 시리즈. 마르크는 그 시리즈를 좋아했다. 밤새 작업실에 앉아 시리즈를 보면서 법의학자가 자신의 여가를 이용해 어떻게 사적인 심판을 하는지를 지켜보았다.....현실이 결코 드라마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르크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 웃기지 마. 블룸은 말하며 그의 옆 소파에 앉았다. 덫에 걸려든 악당을 보살피는 경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정의의 사도가 되어 악을 처단하는 경찰, 모든 게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이야기였다. 복수의 동화, 비현실적인 구성, 시간 죽이기였다.

이제 그 무엇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저 마르크의 추억에만 빠져 있던 그녀는 어느 날,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다 구술용 녹음기를 발견한다. 무심코 녹음기를 작동시키자 마르카가 낯선 여성과 대화하는 녹음이 재생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겪은 여자와 나눈 20건의 대화 녹음. 말도 안 되는 범죄가 벌어졌고 그것을 홀로 수사하며 그녀를 도우려고 했던 마르크. 세 사람의 납치, 강간, 감금. 수 년 내내 이어진 공포. 그 녹음 파일들을 들으면서 블룸은 자신의 마음을 갉아 먹던 고통과 그에 대한 그리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쩐지 모르게 마르크가 다시 살아난 것만 같기도 하고, 마르크와 무언가를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블룸은 녹음 속 여자를 찾아 마르크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난 그녀, 둔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르크가 죽은 것이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덱스터 시리즈를 좋아하던 남편 마르크가 그녀에게 함께 보자고 말을 할 때마다 그를 비웃었던 그녀가 이제는 사람을 납치하고, 토막 내고 있다. 마치 연쇄 살인범 시리즈에 나오는 것처럼. 게다가 그녀에겐 장의차와 장례식장, 냉동고와 시체 처리실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는 조건이다. 둔야가 겪은 끔찍한 일에 대한 분노는 남편 마르크를 죽게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블룸은 둔야가 묘사한 다섯 명의 남자, 사진사, 사제, 사냥꾼, 요리사, 어릿광대를 차례로 찾아 지체 없이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 얼음처럼 차갑게, 이보다 더 단호할 수는 없도록. 복수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정석처럼 말이다. 평범한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건장한 남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한 방향을 향해 군더더기 없이 달려가는 플롯은 매우 간결한 만큼 임팩트가 강하다. 블룸이 어떻게 장의사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거가 처음부터 보여지지 말고, 좀 나중에 나왔더라면 이야기가 주는 충격이 더하지 않았을까 살짝 아쉽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나 심플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복수극은 본 적이 없다. 복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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