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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괜찮았어?"
"생각보다. 당신은?"
"나도."
그렇구나. 서로 괜찮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나.
남편과의 마지막 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던 남자라 직장생활 편했다고 추억하는 여자. 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시작부터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설정으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혼인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어 일년이나 함께 살며 같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민낯을 보여주며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그저 직업이 될 수 있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시스템이란 말인가. 그렇게 주인공 정인지는 남편과의 생활을 종료하고 트렁크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올해 스물아홉으로 결혼정보회사의 VIP 전담부서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웨딩라이프(W&L)의 VIP 전담부서 NM(new marriage) 는 와이프팀과 허즈번드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지는 와이프팀 FW(field wife)로 현장근무를 하고 있다.
물론 인주 또한 처음 W&L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는 기간제 배우자라는 것이 체계적으로 변형된 성매매 아닌가 싶었다. 단어만 다르지 4대 보험을 적용 받는 고액 연봉 접대부와 뭐가 다른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스카우터는 이것이 접대부 렌탈이 아니라고, 회원은 섹스리스도 있고, 그저 조금 다른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회원들은 각자 필요한 조건으로 기간제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생을 건 결혼이 아니기에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 배재 되었을 뿐, 실제 결혼 생활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마치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을 고르듯이 배우자를 골라서 함께 사는, 너무도 삭막한 삶. 대신 부부싸움이나 이혼, 아이, 육아 등의 과정이 전혀 필요 없으니 그만큼 피곤하지 않고, 담백한 삶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저를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화류계 기질 없이 예쁘잖아요."
한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인지는 네 번째 결혼을 막 끝냈고,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아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한다.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다섯 번째 결혼을 지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결혼을 하면서 트렁크를 들고 다니는 삶을 계속해서 이어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 시정의 부탁으로 잠깐 만났던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그녀의 인생에 등장한 것이다. 그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단칼에 그를 거절하고 모진 말도 해봤지만, 그는 인지에 대해 거의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을 품고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행동을 하다 결국 남편과 함께 사는 집까지 찾아오기에 이른다. NM보안팀이 보낸 구조대가 그를 제압해 데려가서 격리시켜버린다. 그녀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납치되어 기도원에 감금되어 학대 받던 그를 풀어주지만, 그는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지나 내 집 마련과 인관 과계가 더해진 5포 세대, 그리고 최근에는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는 7포 세대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아니 사는 게 결혼을 생각할 여력이 없는, 비혼주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즈음 김려령의 이번 신작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떠밀리듯 결혼을 결심하게 되기도 하고, 적절한 사람이 없는 경우 결혼을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던 예전 세대에 비해,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요즘 세대가 더 자유로운 건지는 글쎄 단언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주인공 인지도 엄마로부터 남자친구를 거절 당하지 않고,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의 자살이란 것도 겪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평범한 이삼 십대처럼 일반적인 결혼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이혼 후 각각 기간제 계약결혼으로 배우자를 찾으면서도 친구처럼 지내는 정원과 서연, 젊은 오빠에게 빠진 사랑지상주의자 할머니, 특별한 직업 없이 취미 활동만 하며 소개팅 했던 인지를 스토킹하는 태성, 인지를 몰래 사랑하고 있는 동성애자 친구 시정... 각자가 선택한 삶의 모습은 이리도 다르다. 그런데도 모두 획일적으로 같은 모습의 사랑을 해야 하고, 비슷한 모습의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너무도 슬프다는 생각도 든다. 김려령 작가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너무도 파격적인 소재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는 우리네 삶과 사랑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인지가 트렁크를 다시 싸게 될 일이 또 생길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음 번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