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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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과 그 사람에게 일어났었던 일들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나눈다는 것보다 더 따듯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는 것은 내가 그 혹은 그녀와 마음이 통해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타인이 서로의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믿는 많은 것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생김새, 생일, 연락처, 취향, 습관 등등이 그 사람의 전부는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싶어 상처를 받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온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걸 상대에게 눈이 머는 거라고 비유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세상 조차 절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 구축된다. 단어 그대로 '이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겪게 되는 그런 순간이 오면, 그 비현실적인 경험이 마법의 주문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할거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츨라프와 레나 또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 바츨라프가 레나를 두 팔로 들어 올리고, 레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 짓던 바로 그 순간에 시간이 잠시 그들에게 멈추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때로는 그저 손을 맞잡기만 해도 너무 벅차서 감당이 안 되는 상대를 만나게 되는 법이다.

바츨라프와 레나는 곧장 라시아에게 돌아갔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둘은 서커스를 봤다는 말을 라시아에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경험은 비밀로 해야 하는 법이다.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라서 섣불리 꺼냈다가 누가 나쁜 말을 하거나 비웃기라도 하면 심하게 상처받을  테니까. 게다가 서커스는 사실 놀이기구가 아니니 바츨라프는 정확히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므로 엄마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비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츨라프가 10, 레나가 9살일 때, 그들은 처음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많은 이들이 그렇듯, 이들의 만남 또한 어른들 사이의 친분으로 건너건너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그날 함께 갔던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서커스를 지나다가 난생처음으로 마술이라는 걸 보게 된다. 그것은 순진하고, 호기심 가득했던 두 소년,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릴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들의 인연 또한 바로 그 매혹적인 경험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고, 돈독해졌을 지도 모른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첫사랑.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풋사랑은 대부분 유치하다고 무시하거나, 너무 어려서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린 시절의 그 풋풋하고 두근거렸던 그 마음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바츨라프와 레나처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의 오빠였는데, 바로 옆집에 살았고, 부모들끼리 너무 가까웠고, 아주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거의 모든 걸 공유했던 사이였다. 물론 사소한 오해로 마음이 멀어지고, 이사를 가게 된 뒤로는 연락도 끊어져서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그 당시의 우리에겐 세상이 무너질 만큼의 무게였었으니 어쩔 수 없었기도 했지만, 그 뒤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관계들은 사실상 내가 처음 맺게 된 그 시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씁슬하기도 하고 그렇다.

암기한 공식들을 공책에 적으며 자가 테스트를 하는 동안, 바츨라프는 자꾸만 레나가 생각난다. 당장 방에 들어가서 혼자 레나 생각에 몰두하고 싶다. 무척 설레는 기분이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일상생활에 집중이 통 안 되고, 미스터리가 어떻게 풀리는지 어서 알아내고 싶고, 온종일 오로지 그 책에만 파묻혀 있고 싶을 때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등장인물들이었다. 알콩 달콩, 풋풋하고,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바츨라프와 레나의 에피소드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바츨라프의 엄마인 라시아가 레나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함께 사는 이모는 레나에게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살핌도 주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라시아가 레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자는 걸 지켜봐 주곤 했다. 라이나는 그날도 잠든 레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일어나서 조용조용 불을 끄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엌 싱크대에 초파리가 들끓고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레나가 한밤중에 목말라서 깨기라도 하면 물을 따라 마실 컵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릇들을 남김없이 씻고, 수챗구멍에 박힌 꽁초들을 버리고, 싱크대가 윤이 나도록 닦아낸다. 그렇게 부엌은 깨끗해졌지만, 레나가 한밤중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오다가 바닥에 널린 옷가지에 발을 헛디디지는 않을까, 넘어지다 무릎을 탁자에 찧으면 어쩌나 또 걱정스러워 재떨이를 비우고, 옷들을 한아름 주워 들고, 빈 병들을 버리고, 종이컵, 콜라 캔 등을 전부 버리고 치운다. , 나는 이 장면이 어찌나 뭉클하던지, 라이나는 어쩜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엄마, 아빠도 없이 낯선 이국 땅에서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늘 주눅들어 있던 레나였지만, 하지만 그녀 뒤에 이렇게 그녀를 아끼는 라이나 아주머니가 있었던 것이 너무도 따스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레나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바츨라프가 레나의 숙제를 대신해줄 때, 빨리 끝내버리고 마술 연습을 하고 싶었던 바츨라프는 이렇게 생각한다.

레나가 원하는 것은 바츨라프가 원하는 것이니까.

두 사람은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바츨레나여야 하니까.

이런 게 바로 사랑 아닐까. 네가 나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를 덜 좋아해서 네가 나를 더 좋아하는 건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게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건지. 원래 다들 그렇게 연애를 한다고 쳐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한때 이렇게 순수하고, 절박하고, 바라는 것 없이 다 해주고 싶고, 그저 쳐다 만 봐도 설레 이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다. 나의 마음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열두 살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있었다. 부끄럼 많이 타는 소심한 소녀였지만, 좋아하는 오빠와 단둘이 있을 때는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었던 순수하고, 용기 있었던 그 시절의 나로 말이다.

, 바츨라프와 레나가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는지가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이들이 어떤 위기를 겪고,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어떤 상처를 받고 극복하는지에 대한 줄거리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의 '마음'이다. 이 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바츨라프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그 과정이 바로 그가 레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니 말이다. 가끔은 속고 싶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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