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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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아내인 릴리아에게 그 동안 거짓말을 해왔다. 보안 문제가 있는 회사들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사실 그는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 정부 부처, 재력과 연줄이 있는 개인을 고객으로 그들의 기득권에 손해를 입히는 활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마디로 스파이였다. 그러니 그는 가족에게도 자신이 실제 하는 일을 완벽히 숨겨왔던 삶의 스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는 그에게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쪽지와 그에 대한 목록을 써낸 편지를 남기고는 떠나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고갈된 것 같다며, 긴 여행을, 그것도 혼자만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다. 나는 매혹적이지는 않다 해도 매우 잘생겨 보일 수는 있는 사람이며, 내가 이 삶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대체로, 당신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왠지 당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 주는 내 재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유혹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결코 당신에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손쉬운 칭찬이나 가증스러운 아첨을 하지 않는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재료로, 당신에게서, 당신이라는 천연 원광에서 다듬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버틴다. 그런 다음 당신의 가장 은밀한 허영심에 불을 지핀다.

한국 이름은 박병호, 미국 이름은 헨리 파크.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이다. 미국인 아내와 결혼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나고 홀로 남겨지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민자의 삶이 그렇듯이, 항상 온전히 자신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시간들이었기에 말이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정확한지 의식을 해야 했던 삶이란, 언제나 나 아닌 타인인 척 해야 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셨지만, 아들을 위해 미국에 건너와서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일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이 반드시 가족 문제였다. 아버지의 세계는 오로지 아들과 부인 뿐이었다. 낯선 나라에 살면서 백인과 흑인 사이의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오로지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 투철했다. 미국에 온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그들은 끼니마다 한국식 밥과 김치, 반찬을 먹었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만큼의 애정 표현은 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다.

나는 늘 말에서 나쁜 잘못을 범하곤 한다.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더듬거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한다. 릴리아는 말을 하는 어떤 정신적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한번 배우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little 대신 riddle이라고 말하고, vent 대신 bent라고 말한다. 물론 억양은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늘 두 언어의 위치를 바꾸는, 융합하는 conflate-어쩌면 큰불을 낸다conflagrate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헨리의 아들 미트는 딱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아내와도 본의 아니게 별거 상태가 된 그는 이제 혼자 남겨져 버렸다. 그는 미국계 한국인으로 뉴욕의 시의원이자 유력한 차기 시장후보로 거론되는 존 강이라는 인물의 뒷조사를 맡게 된다. 그를 염탐하던 헨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며 스스로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가 이민자로 살아온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의 긴박함이 쌓이면서 페이지가 쌓여간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가는 여정은 곧 우리네 삶과도 같다. 대부분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살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는 여지없이 내가 제대로 살아온 걸까. 여기 내가 발을 딛고 선 이곳은 어디인 걸까. 나는 대체 누구일까. 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고 만다.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대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정체성에 관한 수많은 이론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만 개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 여정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창래 작가의 95년 첫 장편소설이 작가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이번에 새롭게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고, 노련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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