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로 불리는 온다 리쿠는 그녀의 작품 성향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언제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작가이다. 매력적인 작가를 처음 만나면 늘 그렇듯이 온다리쿠의 작품들을 죄다 찾아서 섭렵하던 때가 있었다. 8년 전, 내가 그녀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이 <유지니아>였는데 무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해 여름은 회사 이직을 하기 위해 짧게 휴식을 가졌던 시기라 여유로웠지만 날씨 때문에 나른하고, 무더웠지만 에어컨을 끼고 살았기에 청량했고, 갑작스레 주어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책을 미친 듯이 읽었던, 나에게는 평생 단 한 번뿐인 계절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느긋하게 여름을 보내거나, 넘치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시간을 쪼개어 가며 너무 바쁘게만 일상을 보내다가 갑자기 루스해지니 나는 기존과는 좀 다른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만나게 된 것이 바로 온다 리쿠였다. 특히나 <유지니아>는 아직도 여름만 되면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색감을 가진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그렇게 2007, 2008년이 아마 그녀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였지 싶다. 이후 <호텔정원에서 생긴 일>, <초콜릿 코스모스> 등의 작품은 지금도 장면 장면이 다 기억날 정도로 이상하게 그 시절에 읽었던 작품들은 나에게 묘한 노스탤지어를 준다. 이번 신작을 읽으면서 또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변명'이라는 단편이 <호텔정원에서 생긴 일>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숨은 뒷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시는지? 주사위의 윗면에 나온 눈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밑면의 눈을 합치면 7이 된답니다."

젊은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주사위 눈은 1부터 6까지만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주사위엔 늘 보이지 않는 7의 그림자가 들러붙어 있어요."

여자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흘깃 보았다.

                                                                                  -'주사위 7의 눈' 중에서


너무도 반가웠던 '변명' 외에도 이 작품에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19편 수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건 차례에 실린 제목은 18편이라는 거. 그럼 나머지 1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정답은 에피소드들을 다 읽고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가야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온다 리쿠만의 수수께끼 같은 설정이다.


갑작스레 사라진 회사 동료가 남긴 암호 같은 단서들(변명), 보이지 않는 7의 나라에서 온 여자(주시위 7의 눈), 애완동물과 사람의 기묘한 살인 공작(협력), 그리고 마치 스파이 영화를 보는 듯한 긴박감 넘치는 한편의 소동극(오해),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진짜 사연(이유), 죽은 자에게 어울리는 잔인한 4(죽은 자의 계절), 무대 공포증이 있는 피아니스트가 엄청난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스토리(둘이서 차를) 등등 짧지만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다양한 소재와 상상력으로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 준다.


흡사 스스로 건 저주 같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입 밖에 내어 말하면 안 된다고 한다. 입밖에 내면 마물이 꾄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다.

반대로, 실현시키고 싶은 일은 항상 주위에 표명해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동기 부여가 되니까 실현시킬 수밖에 없게 되거니와 주위에서도 응원해줄 것이라고.

십중팔구 둘 다 옳을 것이다. 자신에게 저주를 건다는 점에서는 피차 똑같다. 어느 쪽이든, 결국 말이란 무섭다는 이야기다.

                                                                                  -'죽은 자의 계절' 중에서


온다 리쿠의 반전 매력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분명 미스터리 추리물 같은데 완벽하게 열린 결말 때문에 어딘가 모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이중성'에 있지 않나 싶다. 뭐든 계산적으로 따지고, 자신만 위하는 인간의 행동이 사실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손익이 아니라 감정에 좌우되는 인간의 행동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그녀는 '지기 싫다' '실패하기 싫다'라는 생각 때문에 끼고 있는 문제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한다. 멜랑콜리하고, 솜사탕 같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예리한 시선들은 같은 소재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내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독보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고, SF,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지만,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마법 같은 노스탤지어를 담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멜랑콜리하고 키치적 감성과 풋풋한 소녀의 색깔, 독특한 미스터리와 언제나 열린 결말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본격 미스터리는 ''설득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설득을 독자가 납득하면 그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가 된다. 따라서 닫히지 않았다 싶은 결말이라도 전후 맥락을 납득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래서 온다 리쿠가 독특한 팬덤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여운처럼 느껴지고, 명확한 설명이 없어 불친절하게 생각이 되어도 그 모호함이 매력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특히나 표제작인 '나와 춤을'의 이야기는 잠시 내가 소녀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묘한 설레임을 주었다.

나랑 춤추자.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좋아. 라고 그 손을 덥썩 잡게 될 것 만 같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다. 그런데 온다 리쿠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언젠가는 내 꿈도 현실이 되어서 나타날 것만 같다.

늘 보고 있을게. 늘 보고 있어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