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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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중범과 해명, 도범이 도굴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중범은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그곳이 대충 보기엔 명당 혈처럼 보이지만 주검이 영원히 썩지 않을 악지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산길 초입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와 불빛이 보인다. 이들의 행각이 누군가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묘 바닥에 있던 도학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붙잡히고, 중범과 해명만 겨우 몸을 피한다. 중범은 유명한 지관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황창호의 아들이고, 도학은 그의 양아들이다. 중범에게 아버지는 정 붙이지 못할 정도로 싸늘한 인간으로 기억된다. 동생인 효범이 죽게 내버려두었고, 그 이후로 산에 대한 넘치는 양의 지식을 강제적으로 쏟아 부었던 황창오. 중범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어렸기에, 그가 가르쳐주는 걸 익혀야만 했고 그가 걸었던 길을 가야만 했다.

명당이라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은 미쳤다. 하기야 썩어 문드러진 시신 한 구 잘 묻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흙이 되고 말 유골 하나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는 미신으로만 치부하기에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달에 마실 드나들 듯 하는 지금도 사람들은 명당을 찾았다.

중범과 해명은 붙잡힌 도학을 걱정하며, 아내 혼자 효범의 제사를 지내게 내버려 둔 걸 생각하며 심란해하고, 얼마 전에 태어난 아이를 건사할 일을 생각하며 부담을 느낀다. 그러던 중 뉴스를 통해 지난밤 자정 무렵 대통령께서 측근에 의해 저격 당해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 때문인지 그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중앙 통에 탱크도 세워져 있고, 군인들도 쫙 깔려 있어 시내가 살벌한데, 도학의 소식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와중에 암장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불길함이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수락한다. 자신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 지관들은 특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황창오의 가르침이 떠올랐지만, 그것보다 아내인 미란과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하지만 중범 일행은 암장을 하다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붙잡힌다. 중범과 도학, 두 형제는 힘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덧없이 피를 흘린다. '왕의 죽음은 다수에겐 혼란의 무대가 되겠지만 소수에게는 기회가 되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고, 신과 같은 군인들에 비해 풍수사들의 목숨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라가 변할 때마다 지관은 그 중심에서 살든가 죽든가 그랬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이 시절을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게 나일 필요는 없잖아. 군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나 같은 장물아비가 아니라 지관이거든. 지관은 언제나 그랬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라가 변할 때마다 중심에서 살든가 죽든가 그래 왔지.

산의 능선과 능선이 만나 만들어지는 혈, 그 혈이 맺힌 땅의 흙 냄새와 맛, 그 주변을 맴도는 공기,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 벌레와 짐승, 주변의 나무와 잡초 등등을 따지고 분석해야 하는 지관의 눈과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탐욕스런 군인들의 마음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당시의 정세를 묘사해준다. 홀연히 모습을 감춘 중범의 아버지 황창오가 전직 대통령 가문의 묘 자리를 점지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친아들 중범과 양아들 도학 역시 붙잡힌 군인들에게 각각 휘둘리며 그들의 운명은 소용돌이 치듯 엉망이 되어 버린다.

전민식 작가의 전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13>을 모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를 했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소재가 인상적이었는데, 잘나가던 컨설턴트가 한 순간의 실수로 추락해서 고급 애완견라마를 산책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비상을 꿈꾸는 이야기와 금융회사와 정부의 보안 불감증이 우리의 불안을 키우는 지금에 경종을 울리는 개인정보 유출문제, 민간인 불법 사찰에 대한 문제를 다룬 이야기였다. 전민식 작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가독성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장면 장면마다 속도 감 있게 페이지가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재미가 있었다. 이번 작품 <9일의 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직후 9일동안의 장례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 와중에 군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풍수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내세워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 대통령의 암살 이후 권력을 잡으려던 인물들의 다툼과 그런 역사의 한 틈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 역시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간다. 아마도 그가 현실을 반영하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슈를 그리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읽지 않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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