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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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빛나서 시간이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퍼펙트 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뭘 해도 나쁜 결과만 봐야 했던, 이렇게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걸까 싶었던,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 당시에는 세상이 전부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지나고 보니 나는 그 순간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 마냥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 기억을 팔아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로 바꿔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생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다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니, 그래 몇 가지 기억쯤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는 ''를 온전한 ''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타인과 구분되는 것이 허울뿐일 터인데, 그럼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 물고기들은 세상의 어떤 화폐로도 환전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기억과 맞바꿀 수 있을 뿐이죠.

스물 아홉의 나는 스승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독립해 프렌치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어 버려다 오픈을 앞두고 모든 게 박살 나 버리자, N국 국경 근처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렇게나 숙소를 정하고 빈둥거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러,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국경 너머의 P국으로 가기 위해 메카데로 왔다. 그는 그곳에서 열 살 연상의 전 연인 로나와 동갑내기 백인 주코를 만나 함께 요리를 해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그들과 파티를 즐기다 로나가 떠나는 날이 되자 부랴부랴 P국으로 함께 가기로 한다. 그들은 출입국 관리소에서 자리를 비운 관리를 반나절이나 기다리다 밖으로 나왔고, 그곳을 걸어 다니다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소년들을 만난다. 소년들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장이 선다며, 그들을 국경시장으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온갖 물건들이 가득 있었고, 배낭 객들이 골목마다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고, 거기서 계산을 하려다 난관에 봉착한다. 이곳에서의 화폐는 강 상류에서 잡히는 물고기 비늘이라는 것이다.

기억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그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기억을 판다. 보통은 첫 거래에서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판다고 하는데, 어차피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이니 없어도 별 상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팔아 바꾼 화폐로 시장의 갖가지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이다, 결국 기억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을 모두 전소시켜버린 로나는 더이 상 로나가 아니었다. 우아한 독신 귀족 같던 여자는 이제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장이 열리기 때문에, 달이 기울어지자 가게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한다. 붐비던 시장은 열두 개의 골목에서 여섯 개의 골목으로, 거기서 다시 세 개의 골목으로 서서히 줄어들어 결국 단 하나의 골목만 남기고 사라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달의 음모였던 것일까. 표제작인 <국경시장>은 이렇게 환상동화 같은 미스터리하고도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심술궂은 삶에 이제는 지쳐버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 음미하는 일이 즐겁지가 않다. 어릴 때는 똑똑하다고 따돌림을 받았고, 커서는 음침한 성격이라며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피서지로 떠난 여름에도 혼자 도서관에 앉아 모래 대신 잉크를 묻히던 청춘의 시간들. 그때 내 목표는 일찌감치 교수가 되어 지나치게 똑똑한 나머지 마음의 온도를 잃어 차가워진, 그런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쿠문>의 나는 여섯 살 어린 동생의 재능을 질투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매를 죽도록 미워했다. 선천적으로 평형기관에 이상이 있어 자주 넘어지곤 하는 동생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외면한 순간, 그들 사이를 차 한대가 지나갔고, 그렇게 동생은 두 번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만다. 천재 동생의 언니에서 바보 동생의 언니가 되고, 끝을 알 수 없던 질투가 종결되자 목적과 생기를 잃은 나는 권태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타블로이드에서 믿거나 말거나 가십 기사를 읽게 된다. <쿠문>은 일명 천재 병이라고 해서 잠복기에는 갑자기 명랑하고 영리한 사람이 되어 주변의 인기를 차지하고, 첫 번째 발작이 시작되면 갖은 환영을 보며 온갖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3~5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이 병은 일종의 불치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에게 쿠문에 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과 이전의 삶 중에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나는 결국 죽음을 불사할 용기를 자신의 재능에 투자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도 있을 법한 스토리라 잔혹 동화 같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필멸> 역시 뛰어난 재능을 얻기 위해 무섭게 달려드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건강과 재산이 모두 파산한 앙투안은 세 의 동료들과 광란의 밤을 보내고 불멸의 곡을 작곡하기 위한 영감을 얻는다. 그런데 그 영감이 그에게만 내려진 게 아니라 함께 했던 세 명의 동료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찾아왔다면? 그렇다면 그 곡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재능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버린 이는 그걸 얻기 위해 그 어떤 방법도 서슴지 않고 달려든다. 그것이 설사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쿠문> <필멸> 그리고 <국경시장>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배경이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꿈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섬뜩하다는 데 있다. 어디선가 멜로디 인형의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다가 갑자기 잔혹동화의 결말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동족>에서 글자를 읽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었던 킹코브라 여왕의 죽음이나 <관념 잼>에서 결혼과 회사생활에서 모두 실패해 지방으로 이사 온 낙경 씨가 점점 '사물화'되어가는 모습은 사실 좀 무시무시하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이야기는 모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묘하게 자꾸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매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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