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얼마 전에 힐링 캠프에 김영하 작가가 나와 강연한 것이 한참 화제가 됐었다. 거침없이, 정곡을 찌르는, 그리고 너무 솔직한 그의 입담에 당황하면서도 홀린 듯이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군부대에 강연을 갔을 때 제대를 앞둔 병장이 자기는 집안 형편도 어렵고, 스펙도, 학벌도 시원찮은데, 어떻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김영하 작가의 대답은 ", 잘 안 될 거예요."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없는 희망을 억지로 주지 않고, 나는 작가라 여러분에게 성공하는 법 같은 것은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하는 명쾌함. 작가는 실패 전문가이고,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라고. 하하. 이 한 대목만으로 김영하 작가를 몰랐던 많은 이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탓에, 두고두고 그 강연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김영하 작가는 소위 '말 잘하는 작가'중에서도 선두주자라서 그가 했던 숱한 강연 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되어 매우 기대가 많았다.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으로 예정된 김영하 산문 집 중 두 번째인 <말하다>는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온 인터뷰와 대담,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일반적인 대담 집 형식에서 벗어나 작가가 직접 인터뷰와 강연을 해체하고 주제별로 갈무리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것이 이 책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을 기억하십니까? 저에게 그것은 어떤 금지된 세계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동안에 우리는 일상적인 시공간, 익숙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해주고 아버지가 날마다 출퇴근을 하는 세계.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유용한 것을 배우는 세계. 그런데 집 책꽂이에는 어른들이 읽는 소설이라는 것들이 무심하게 꽂혀 있습니다. 이걸 뽑아 읽기 시작한 어린이는 즉각적으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의견에 백 프로 동의한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모험의 세계, 하늘을 날거나 고아가 되거나 마법을 사용하거나 무인도에 상륙하거나. 그렇게 놀라운 세계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퇴근해 집에 들어오거나, 어머니가 숙제 다 했느냐고 물으면 시침을 뚝 뗀 채,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던 그 기억. 나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네 자매 중에 셋째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덕분에 책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언니들이 잔소리를 하거나, 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 나는 책을 방패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 골라 펼쳐 든 책 한 권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라고 했던 에리카 종의 표현처럼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소설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물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 산문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 실패가 때로는 존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으라고 말한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다들 앞날이 불안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니, 더더욱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자기계발서니, 인문서는 읽으면서 소설은 '소설 나부랭이'라 치부하고 읽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어보게 하고 싶었다. '소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너무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소설 나부랭이'로 치부하던 이들도 아무 말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나 장황하고, 합리적이고, 감동적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저는 언제나 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 소설들은 이미 쓰인 다른 작품들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든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오래 남는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도 아니고, 온전하게 책만이 작가를 만든다고. 당연한 하게도 모든 작가는 독자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아무 책이라도 더, , 계속 읽고 싶어졌다.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의 책을 부른다. 어떤 책들은 질문을 던지고, 또 어떤 책들은 수많은 다른 책들을 끌어 당긴다. 그렇게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쌓인 책들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를 작가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의 모습일 수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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