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 - 천부적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영어의 역사
필립 구든 지음, 서정아 옮김 / 허니와이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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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메뉴 판의 코스와 음식들이 모두 영어로 표기된 걸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큰 활자로 영어가 있고, 그 아래 작은 활자로 한글로 인쇄되어 있는 메뉴 판을 보면서, 이렇게 해야 세련되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외국인 손님들을 생각하며 배려해놓은 걸까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비단 레스토랑뿐만 아니다. 거리 곳곳의 간판들은 대부분 영어 혹은 영어화된 한국어로 지어진 이름들이 수놓고 있다. 바야흐로 영어가 곧 세계화의 첫 걸음으로 인식되는 시대인 셈이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이다.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를 제외하더라도, 영어를 제2언어로 배우고 말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도 역시 초,,고등학교 기본 과정에 영어가 필수인데다, 입시는 물론 취직 때도 영어를 잘해야 유리하기 때문에 영어를 입시처럼 배우고 익힌다. 하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보면,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게 아닌 이상 딱히 영어를 자주 쓸 일이 없다. 그래서인지 십여 년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몇년 만에 영어 단어들은 우리의 머릿 속에서 하나 둘씩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마도 주입식 교육의 병폐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의 언어로 묻어두기엔 영어가 눈에 너무 자주 보이는 요즘이다.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해봐야 하나 싶을 만큼 말이다.

이 책은 영어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영어라는 언어 속에 어떠한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인 필립 구든은 오래 전부터 한편의 소설처럼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진진한 영어 이야기를 많은 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하는데, 영어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로 쉽게 풀어나가는 이 책을 읽게 되면 잠시 잊고 있었던 영어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to 부정사 사이에 부사를 넣어 쓰는 분리 부정사의 유명한 사례는 TV시리즈 <스타트렉>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내레이션 "To boldly go where no man has gone before (그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과감하게 나아가는 것)" 에서 찾을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분리 부정사를 트집 잡는 사람들을 싫어해서 <타임스>지에 일부러 분리 부정사를 잔뜩 넣은 항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네 편집자 중에 오지랖이 넘쳐 분리 부정사를 찾아 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 깐깐한 인간을 당장 해고하시길 요구합니다. 그 사람 스스로가 빨리 나가려 하든 말든 (to go quickly or to quickly go or quickly to go)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점은 지금 당장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셰익스피어가 사는 동안 영국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밑에서 강국으로 떠올랐고, 그 시대에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바로 영어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어는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실험과 말장난 재료가 되기도 한다. 영국의 국민 작가 셰익스피어는 영어에 영원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그가 만든 단어 가운데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실린 것만 해도 3,000개에 이른다고 하니 시대를 타고난 천재의 멋진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학창시절 단순히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외우느라 고생했던, 그래서 영어라는 언어의 재미에 대해서 느낄 겨를도 없이 어른이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너무도 놀라운 사실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원전 750년의 초기영어부터 중세 영어, 근대 영어를 거쳐 현대의 영어, 그리고 21세기 이후 미래의 영어에 이르기까지 영어가 어떻게 발전되고, 전파되고, 달라졌는지에 대한 스토리는 너무도 다채롭고 풍부하다.

페이스북에는 회원들에게 '문법 파괴자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테러 행위를 기록'할 것을 권장하는 그룹이 있다. 수천 명을 회원으로 거느린 이 그룹의 이름은 'I Judge You When You Use Poor Grammar(당신이 잘못된 문법을 쓰는지 판단해 줄게요)'. 반면에 올바른 영어라는 개념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반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지만, 어쨌든 영어를 둘러싼 논쟁은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처방주의자(prescriptivists)와 언어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서술주의자(descriptivists)의 한판 대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맞춤법, 문장부호, 발음 등 영어에 관한 격렬한 논쟁과 역사적 사건에 따라 영어 단어와 문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재미있다. 계층 문제와 편견을 잔뜩 숨기고 있는 h발음, 그리고 언어가 무기가 되는 순간 정치에 어떻게 이용이 되고 있는지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완곡어법과 PC를 무더기로 사용하는 일이 많은 정치 연설에 관한 사례는 특히나 영어를 현재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어느 역사서에서도 언어인 '영어'의 역사에 대해 다루지는 않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곳곳의 역사를 통해 읽어본 히스토리는 수천 개의 언어들 중에서도 '왜 영어인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준다. 이 책은 영어 공부와는 너무 멀어진 어른들이 읽기에도 괜찮고, 현재 영어를 공부 중인 학생들이 읽는다면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을 정복한 언어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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