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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린다가 지친 표정으로 희생자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그 남자에게 몰두 중이었다. 털이 수북한 배에 꽂힌 칼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와 살인범인 여인의 모습이 새겨진 허공을 향한 무표정한 눈도.

'하지만 피가 진짜같이 보이지 않아. 또 망쳤어.'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본 적이 있거나, 시체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서는 실감나기 묘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워낙 추리, 스릴러 분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언젠가 법의학 관련된 책까지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본 실제 부검 현장, 살인사건 현장은 일반적인 범죄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었다. 단순한 상황 묘사로는 이렇게 시각으로 확인하는 끔찍 함까지는 그려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가 마치 실제 부검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국내에선 <눈알 수집가>로 알려진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 함께 합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재미있는 것은 직접 부검을 하는 이가 법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 생 초보라는 점이다. 죽음과 폭력장면을 묘사하는 일을 가장 어려워하는 여류 만화가가 법의학자의 지시를 전화로 듣고 실제 시체를 부검하게 된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법의학자 파울 헤르츠펠트는 여느 때처럼 부검 실에서 잔혹하게 손상된 여자 시체를 부검 중이었다. 그는 해골 부위에서 엑스레이 사진으로 작은 이물질을 발견하고 핀셋으로 꺼낸다. 금속으로 된 캡슐처럼 보이는 그것을 열자 아주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현미경을 통해 본 그것에는 몇 개의 숫자와 여섯 개의 작은 알파벳 글자였다. 그런데 그걸 보는 순간 그의 맥박이 뛰기 시작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며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쪽지에 쓰인 알파벳 들을 조합하면 '한나'라는 그의 열일곱 살 된 딸의 이름이 되기 때문이었다.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자 음성사서함으로 남겨진 절박한 딸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그는 이혼 후 딸을 거의 만나지 못했고, 수주일 만에 딸의 목소리를 도움을 외치는 공포 섞인 목소리였던 것이다. 절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선 안되며, 추가적인 지시 사항을 기다리라는 딸의 말에 그는 천식을 앓고 있는 딸의 상태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만화가인 린다는 자신의 전남자친구이자 스토커인 대니를 피해 헬고란트라는 섬에 도망쳐와 있는 중이다.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헬고란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피를 한 상태이고, 점점 더 나빠지는 기상은 누군가 섬에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할 수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헬고란트라는 섬은 현재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상태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시시각각 자신의 집에서 대니의 짓이 분명한 행동들을 알아차리고, 점점 두려워한다. 욕실의 수건이 젖어 있고, 침대 위에서 그의 스킨로션 냄새가 나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간다. 폭풍 속으로. 그리고 해안가에서 우연히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헤르츠펠트는 딸을 찾으려면 납치범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고, 그럴려면 해안에서 발견된 그 시체를 부검해서 단서를 발견해야만 한다. 하지만 헬고란트 섬은 현재 폭풍으로 인해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섬에서 시체를 발견한 만화가 린다는 메스라는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 해부를 감행한다.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의 합작품이라 그런지 부검을 하는 장면은 매우 실감나게 잘 쓰여져 있다. 특히나 부검을 하는 인물은 난생 처음 메스를 쥐어본 여성이라, 독자 입장에서 감정 이입하기도 매우 수월하고 말이다. 어떤 사실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그런 인식에 따라 실제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니, 우리는 린다라는 여성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 서서히 동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말이다.

"희생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전체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오."

슈빈토프스키가 설명했다.

"그것은 모든 실종자 신고접수와 함께 수색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경찰의 문제이고, 아동강간범보다 탈세범을 더 엄하게 처벌하는 사법 당국의 문제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던 불법 카지노에 대해서는 나를 독방에 처넣고 싶어 하면서, 성폭행범들에게는 그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즉시 감옥 밖에서 노역할 기회까지 줄 것을 권고하는 심리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오. 그리고 당연히, 이른바 법치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법의학 기관의 문제이기도 하오. 거기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에는 범인에게나 유용한 것이고, 희생자들을 두 번 벌하는 거나 다를 바 없소."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심장 쫄깃해지는 긴장감과 속을 알 수 없는 동행자와 함께하는 범인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체크가 데뷔작인 <테라피>를 출간하고 했던 인터뷰에서 <’긴박감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삭제하겠다는 생각으로 최종 수정해 원고의 3분의 1을 버리고 나니, 다음 장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원고가 잘 마무리된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군더더기가 없이, 플롯에 꼭 필요한 것들만 남아 있어 스토리 진행이 매끄럽다. 지루하거나, 늘어지거나, 불필요한 상황 묘사가 길어지거나, 중언부언 설명조의 대사가 있거나, 이런 요소들이 작품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요소인데, 피체크의 작품에선 거.. 이런 대목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한번 페이지를 잡기 시작하면 내리 끝까지 멈출 수가 없게 만든다. 여지껏 단 한번도 그의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거나, 읽다가 앞 페이지로 돌아가 뒤적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도 심각하지만, 사회에 관행처럼 퍼져있는 사람들의 습관, 인식으로 인해 그저 당연하게만 알고 있는 법의 맹점을 차갑게 고발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난 후 에필로그처럼 덧 붙여져 있는 몇몇 신문 기사를 보라. 일곱 살 난 딸을 무려 282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해왔던 아버지에게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네 살 난 아이를 학대한 남자는 22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지만, 변호사들이 검사와 법원을 상대로 합의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에 비해 주식 사기범에게는 5 6개월의 징역이 선고되었고, 탈세와 투자사기범에게는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과연 법의 처벌이 그 죄의 무게에 맞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법치국가의 규정이라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빠져 나갈 구멍을 이리도 쉽게 만들어주면서, 정작 희생자를 위한 처우는 개선되지 못하고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 같은 고통을 주는지 말이다. 이 작품에선 피체크 특유의 독보적인 반전이나 복잡한 플롯도 없고,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너무 빨리 들어나 버려 살짝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주제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거운 주제를 인물을 통해 설교하는 식으로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묘한 여운으로 남게 만드는 그 능력 때문이다. 그것이 여전히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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