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언젠가 파일로 밴스가 등장하는 책을 읽다가 S.S. 밴 다인의 작가 이력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의사에 지시에 따라 2년간 장기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담당 의사는 독서를 금지시켰다. 지나치게 많은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였기에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는데, 밴다인은 의사에게 미스터리 소설만은 읽을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요양하는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어댔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부터 연대순으로 현대 작품까지 읽기 시작했고, 자신이 읽은 것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 결점이 분명하게 드러난 미스터리 작품들이 쇄를 거듭하여 팔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경험과 연구가 월등한 자신이 더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거기서 새로운 탐정 캐릭터를 구상하고 풍부한 교양과 현학적인 묘사가 흘러 넘치는 입담의 파일로 밴스라는 탐정이 탄생한다. 그는 탐정 소설을 쓸 경우에는 매우 명확한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글쓰기 원칙들을 간결하게 정리해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 가지 규칙'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먼저 <녹스의 십계>의 각 항목을 수식으로 기술해 10차원의 매트릭스를 구성한 뒤 이것을 '녹스장'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녹스장에 저자와 독자의 대결 방식에 기반한 '2-제로섬-유한[확정[완전정보형 게임'의 알고리즘을 채우고 쿠머와 후마얀의 스토리 생성 방정식을 거꾸로 돌려 해의 분포를 그림으로 그린다.

유안의 짐작이 옳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해의 분포는 황금기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점점 더 똑똑해지는 독자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지혜를 짜내 고안해낸 정교한 속임수나 플롯의 이노베이션 곡선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작법 그 자체보다 수많은 미스터리물을 읽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화해서 이론화한 그의 능력에 감탄했는데, 사실 이것은 장르 소설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밴 다인의 규칙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물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들을 분석해서 추려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만약 현대의 범죄,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도 그 수많은 작품들을 전부 다 분석하고, 규칙을 파악할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넣고 돌릴 수 있다면, 그걸 토대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오로지 그 규칙들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의 손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언젠가는 정말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램이 기존에 출간된 작품들의 장점을 추려 모으고, 단점을 정리해서 보완할 수 있다면 새로운 작품을 써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공상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신작 <녹스머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감탄과 공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런 소재로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책은 일반 적인 미스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다소 머리가 아플 수 있고, 혹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헤맬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정말 획기적으로 새롭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만큼 행복한 재미를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야기는 2058년의 어느 날, 상하이 대학의 유안 친루가 국가과학기술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 걸로 시작한다. 소환장에는 유안의 박사논문에 관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유안 친루는 문학수리해석을 전공한 문학 연구자이다. 배경은 컴퓨터로 제작하는 오토포메틱스 문학이 노벨 문학상까지 받는 그야말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이다.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 생성 방정식이 발표되자, 인간의 뇌와 손이 창작해내는 문학은 내용 면에서나 비용 대비 효율 면에서 '오토포에틱스'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완전히 자동화된 이야기를 창작하겠다는 꿈이 현실화된 세상인 것이다. 주인공 유안의 전공인 문학수리해석은 시나 소설 작품에 사용되는 단어나 관용구의 빈도를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학문으로 이것을 통해 어구의 수준부터 문장의 결합, 작품 구조 해석에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고, 작가 고유의 문체를 통계학 기법으로 완벽히 되살려낼 수 있게 된다. 분명 이것은 소설 상의 설정일 뿐인데, 나는 어쩐지 이것이 미래의 언젠가 실제로 현실로 이루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 세상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문학이 삭막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유안이 발표했던 논문은 로널드 녹스가 발표한 탐정소설의 규칙 '녹스의 십계'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 연구자들 대부분은 밴 다인의 '잠정소설 작법의 20법칙'을 해석 모델로 사용했으나,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융통성이 없고, 엄밀성이 결여된 기술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과학기술국 장관은 바로 그 논문에 양방향 시간여행의 난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다며, 유안에게 녹스가 이 책을 집필하던 1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들의 가설이 옳다면 역사상 최초의 양방향 시간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용기를 내어 밝히겠다. 솔직히 크리스티 여사가 나를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그의 전기작가 지위에서 물러나게 만들면 어쩌나 두려웠다.

들러리의 전통이라거나 탐정소설의 공정한 플레이라는 식의 그런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심경 변화로 포와로와 쌓아온 오랜 우정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두 번 다시 포와로의 모험에 함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가? 오직 그 점만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이 셰퍼드 의사의 수기로 발표된 탓에 나만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총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녹스머신>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수록된 〈논리증발 - 녹스 머신 2〉에서 기묘하게 완성된다. 〈들러리클럽의 음모〉는 불멸의 고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존 왓슨 박사, 헤이스팅스 대위 등 들러리들이 모여 애거서 크리스티와 벌이는 색다른 두뇌싸움이 주요 스토리인데, 정말 유쾌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다. 〈바벨의 감옥〉은 기존의 그 어떤 탈옥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른 스토리를 자랑한다. 특히 이 작품은 일본어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으로 구성된 작품이라, 중간중간 경상인경이 주고 받는 메세지가 세로쓰기로 구성되어 있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 리뷰를 쓰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상을 더 길게 언급한 이유는 이 작품만의 새로움을 글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혹은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야 오롯이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가 천만 돌파를 하는 요즘에 시간여행, 양자역학 같은 현대물리학 지식을 총동원한 미스터리라 너무도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상상력에 정점을 찍는 이야기생성에 관한 아이디어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그동안은 작가의 이름 '노리즈키 린타로'와 같은 이름의 탐정이 등장하는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만 읽다가, 이번에 출간되는 책은 무려 SF 미스터리 집이라고 해서 더욱 궁금했던 작품인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읽었던 미스터리물 중에서 가장 색다르지만 공감되고, 복잡하지만 명확하며, 어렵지만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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