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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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뉴스데스크 최연소 앵커부터 국내 최초 프리랜서 앵커 선언까지... 하는 일마다 이슈를 불러왔던 최고의 앵커, 앵커계의 전설 백지연씨의 첫 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두세 살 되던 생일날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이가 스무 살 성인이 되는 생일이 되기 전까지 책 10권을 써보자고. 물론 그때만해도 자신조차 그 결심을 믿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이 책 <물구나무> 10번째 책이라고 한다. 그 동안 써왔던 에세이와는 달리 소..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앵커 백지연'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뢰와 파워 때문인지 그녀의 창작물도 기대가 어느 정도 되기는 했다. 감상에 빠져 멋만 부린 소설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 소설은 첫 번째라는 이름에 걸 맞는 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소설가 백지연의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다.

방송국을 나와 회사를 차리고 독립해 전문 인터뷰어로 일하고 있는 민수에게 어느 날 여고시절 단짝 친구 수경에게서 연락이 온다. 고등학교 시절 3년간 붙어 다니던 친구들 중 하나였지만, 졸업 후 정확하게 27년 만에 온 연락이다. 그들이 27년 동안이나 연락 두절 상태로 지내게 된 계기는 너무도 사소한 거였지만, 때로 인생은 그런 것 같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어찌하다 보니 서로에게 손을 내밀 시기를 놓쳐 그저 시간이 무덤이 되어 쌓이기도 하는 것이다. 명문대에 합격하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친구들은 지금 돌아보면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미팅 사건으로 무려 27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버린다. 지금이라면 그저 웃어 넘어갈 헤프닝으로 보이지만, 그때 그 시절 어린 마음에는 이해하지 못할 배신감이었으리라. 학창시절 뛰어난 실력으로 학교의 수재였던 수경은 대학 졸업하자마자 선 보고 바로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 엄마가 되었다. 그들 중에 가장 결혼을 늦게 할 것 같았던 그녀가 제일 먼저 결혼하고, 일은 전혀 안하고 주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건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찾아 볼 수 있는 인생의 아이러니이다. 이럴 거면 죽어라 공부해서 명문대는 뭐 하러 갔나. 시집 잘 가려고 공부한 건가. 하는 한탄이 나오기도 할 만큼 말이다.

"이제 나는 그냥 누구의 와이프고 누구 엄마고, 언젠가 우리 애들 결혼하면 그때는 또 누구의 사돈, 누구의 할머니로만 불리겠지. 나도 한때 잘하는 게 있는 인재였다는 걸 누가 알아나 주겠니. 나도 모르겠는걸 뭐. 그리고 공부 잘한 사람이 인재라고 할 수 잇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그녀도 엄격한 아버지의 뜻대로 졸업 후 바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재벌집 사모님이 아니라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의 인생이 달라졌겠지요." 라는 말은 생각보다 꽤 자주 통용되는 말인 셈이다. 내가 그때 이 길로 가지 않고 저 길로 갔다면, 이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저 사람과 함께 했더라면.. 삶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기에 언제나 뒤돌아 후회만 하지만, 사실 또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을 위험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딪혀야 하는 거니까. 최고의 수재로 서울대에 입학했던 수경, 치대에 입학했던 하정, 언제나 당당했지만 집안 환경은 어려웠던 승미, 3개 국어 능통에 유난히 자상한 아버지를 가진 문희, 공부보다는 소설에 빠져 살았던 미연. 그리고 인터뷰어인 민수. 이렇게 여섯 여자의 인생이 주요 스토리이다.

27년 만에 이들을 하나로 다시 연결하게 되는 계기는 하정이의 죽음이다. 민수는 수경으로부터 하정이가 죽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확실치 않아 남편, 가족, 주변인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죽은 채 입에서 발견됐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게 없지만,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편과 죽기 전에 부부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거기다 하정이 부모님은 부검을 해야 한다 하고, 남편 쪽은 세상 시끄러우니 어서 장례를 치르자고 부검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남편의 바람과 이혼 요구로 상처받아 힘겨운 수경은 민수에게 친구들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하정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자고. 그렇게 인터뷰어로 오래 전 친구들을 만나 그 동안의 일들을 다시 듣게 되는 민수의 앞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전개로 치닫는다. 명문대에 합격하기만 하면 인생이 순탄대로 흘러갈 것 같았지만, 어디 사는 게 내 맘 같기만 하겠는가. 무려 삼십 여년 가까이 왕래가 없었던 친구들이기에 그들 각자가 겪어야 했던 시간의 골과 각자의 입장에서 한 사람을 기억하는 내면의 풍경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인생 정말 모를 일이지. 내 일에 하정이 일까지 겪고 나니 확 자신이 없어지더라. 산다는 것에 대해 더럭 겁이 나.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가. 어릴 때는 물어볼 사람도 있었고 힘들면 팔 붙잡고 늘어질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뭐 하나 붙들게 없네."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소녀 시절의 풋풋함도, 치기 어린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진부한 듯 보여도 공감되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나 화자를 전문 인터뷰어인 민수로 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또한 매끄러워 몰입도를 높여주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백지연씨의 분신처럼 보이는 민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방송, 인터뷰에 대한 자세나 준비, 상황들이 리얼해서 더욱 그런 거였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정이의 죽음이 시작이었지만,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는 각자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의 삶에 주목해서 담백하게 펼쳐진다. 어쩌면 이 작품은 '앵커' 백지연이 아니라 '여자' 백지연으로서의 첫 번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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