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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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처음 보고는 꽤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20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마든 작품으로 성폭력, 동성애, 오르가슴, 출산 등 여성이 겪는 모든 상황에 대해 거침없이 다루는 연극이다. 특히나 금기시되어왔던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삼아 공연함으로써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로 '여성의 억압된 성을 말하며 세계를 도발한 작가'로 기억되는데, 그런 그녀가 쓴 7개월간의 자궁암 투병을 토대로 한 회고록이라고 해서 이번 작품은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을 주었다.

나는 내 몸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거기서 튕겨져 나왔고,길을 잃었다. 아기를 낳지 않았고 나무를 두려워했다. 대지가 나의 적이라고 느꼈다. 숲 속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하늘도 노을도 별도 볼 수 없는 콘크리트 도시에서 살았다. 나는 엔진의 속도로 움직였는데 그건 내 호흡보다도 빨랐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 대지의 리듬과 동떨어져 살았다. 그렇게 이질적인 정체성을 극대화하고 검은 옷을 입고는 우쭐해 했다. 내 몸은 짐이었다. 그것은 내가 운 나쁘게도 지고 가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몸의 요구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와의 나쁜 기억 때문에 자신의 몸에 대해 평범하게 느끼며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여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태어난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세계 60개국 이상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잠자리에서 들볶이는 여성, 부르카를 입은 채 매질 당하는 여성, 부엌에서 산을 뒤집어쓴 여성, 죽은 줄 알고 주차장에 내팽개쳐진 여성들의 이야기들. 난민 촌의 불 타버린 건물과 마당에서 그녀들은 온몸에 생긴 칼과 담뱃불 자국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콩고에 갔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산산 조각 낼 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거의 13년 동안 극심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그곳에서 여성 수십만 명이 강간과 고문에 시달렸고, 민병대들은 마을에 들어와 학살을 일삼았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그렇게 목격한다. 몸의 종말, 인류의 종말, 세계의 종말.

우연한 사건은 없다. 혹은 모두가 우연한 사건인지도 모른다. 내 친구 폴은 이렇게 말한다.

"마치 네가 콩고 성흔을 갖게 된 것 같아."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당연하지만, 이브, 놀랍지도 않아. 최근 수년 동안 들은 그 많은 강간 이야기라니. 그 여성들이 네 안에 들어간 거야."

어쩌면 친구 폴의 말대로 콩고와 그곳 여성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그녀를 집어삼켜 암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렇게 그녀의 자궁에서 커다란 암세포가 발견된다. 나는 어쩌다 암에 걸렸을까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며 분노하고 거부하는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해왔지만, 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이제 환자가 되는 법을 배우셔야 한다고. 이런 상황이 일종의 전환점이 될 거라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법을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의사의 말은 그녀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이런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외면해왔던 과거와 마주서고, 이겨내서, 극복해내야 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이제는 삶을 바꿔야 해요.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몰아대서는 안 돼요. '이 망할 자식아', '두고 봐' 같은 반발로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당신이 병이 든 거예요. 당신의 병이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몸을, 신경체계를 혹사시킨 것,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항상 상상의 적을 몰아내고 항상 자신을 압박하고 몰아친 것, 압박하고 싸우고 몰아댄 것 말이에요."

그녀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아빠의 높아지는 목소리를 들었던 이후 처음으로 그녀 몸 한 가운데에서 뭔가 긴장이 풀렸고, 진정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그녀는 7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수술과 치료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토록 부인해왔던 자신의 ''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세상의 몸과의 완전한 연결을 경험하게 된다.

"빼앗아 가려거든 빼앗아 가라 하자. 그 대신 우리의 고통을 힘으로, 우리의 희생을 타오르는 불로, 우리의 자기혐오를 행동으로, 우리의 자기 강박 증을 봉사로, 불로, 바람으로 바꾸자. 바람. 바람. 바람처럼 투명해지고, 바람처럼 무자비하고 위험하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자."

워낙 세상과 투쟁하듯 살아온 그녀라 암을 치유하며 써 내려간 투병기 또한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바람처럼 무자비하고 위험하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지지하고, 결국 병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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