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다 읽고도 종이들을 붙잡고 읽는 척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엄마에게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애정을 갈구하는 외롭고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알기는 아는 걸까?

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리고 부모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간다. 외모는 점점 부모를 닮아가더라도,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부모 또한 자식에게 모든 상황에 대해 전부 솔직할 수만은 없다. 그러니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부모의 모습이 진짜인지는 의문이 드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어느 날, 한동안 왕래가 없었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온다.

"네 엄마가..... 엄마가 좀 안 좋다."

아버지는 엄마가 아주 끔찍한 망상에 빠졌다고, 의사 말로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며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니엘은 자신이 그 동안 뭔가 놓친 게 있는지, 지난 5개월간 엄마 가 보낸 이메일 들을 살펴본다.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엄마가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 한 통. 다른 내용은 하나도 없이 그저 다니엘의 이름과 느낌표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근사한 농장 생활, 따뜻한 동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전혀 이상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뭘 간과했을까 불안하면서, 그 동안 농장 방문을 미뤘던 것에 대한 자책감을 느낀다. 다음날 급하게 여권과 티켓을 챙겨 공항으로 가지만, 엄마가 이미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아버지의 전화에 이어,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 인간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난 미치지 않았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 자식이라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걸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서운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 부모님은 내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부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두 분 이서 서로를 대하는 모든 방식이 여름을 나면서 바뀐 것만 같았다.

이 작품은 삼백 페이지가 넘는 동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다니엘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단계별로 말을 해야한다면서, 정작 중요한 부분은 쉽사리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다니엘만큼이나 독자인 나도 조바심이 날만큼. 그래서 결국 실제로 스웨덴의 농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다니엘이 직접 조사하는 것은 후반부 잠깐이고, 엄마가 일기, 편지를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들려주는 것이 작품의 거의 전부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야기는 전혀 지루할 틈이 없게 진행되고 있다. 다니엘은 아버지, 어머니 어느 한 쪽의 말만 믿을 수 없기에 아버지 몰래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주고, 어머니 몰래 아버지와 연락을 한다. 모자간의 대화 장면은 마치 무슨 첩보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주고 있는데, 솔직히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독자인 내 입장에서 듣더라도, 다니엘의 어머니가 하는 말들은 망상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상당수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녀의 망상처럼 보이는 집념이 진짜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는 한 쪽의 입장만을 알려줄 뿐이다. 진실을 파악하려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듣고, 제3의 인물을 통해 상황을 파악해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니 말이다.

가족이란 사랑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공동체이고, 그 사랑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믿음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논리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신뢰하는 그것. 믿음에는 그렇게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진실은 바로 '무조건'이라는 건데, 사실 어디 우리 삶이 그렇게 되던가 말이다. 누구나 가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하다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 설사 그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더라도, 진실한 믿음은 결국 상대방에게 전해 전해질 것이다. 이 작품은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진실인지, 망상인지 모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도록 쓰여졌다. 그래서 작품의 후반부에 다니엘이 스웨덴에 직접 가서 부딪히는 진실은 사실 좀 충격적이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갈등의 주요 플롯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차일드 44>로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던 톰 롭 스미스의 이번 작품은 전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스릴과 긴장을 만들어내 역시! 라는 감탄사를 뱉어내게 만든다. 게다가 내년에는 <차일드 44>를 잇는 3부작 <시크릿 스피치> <에이전트 6>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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