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책을 너무 너무, 과하게, 많이(같은 뜻이지만 무려 세 번의 강조할 정도로 많은 양을) 읽어대다 보니, 거의 하루에 한 권씩 혹은 하루에 서너 권 씩 마구 읽다 보니 초반 몇 페이지만 읽어도 마지막 페이지가 예상되거나, 전개될 스토리가 뻔해서 그냥 덮어버리거나, 몇 문장만 봐도 행간에 억지로 숨긴 의도가 보여 지루해지거나, 그러니까 뭘 읽어도 재미가 없는, 딱히 어떤 이야기도 나를 사로잡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유일한 처방전은 책에서 아예 손 놓고 시간을 보내거나, 이야기와 플롯에서 해방된 책을 만나거나, 조금 가벼워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만난 전경린 작가의 신작은 딱 그런 상황일 때에 읽으면 너무 좋을 만한 작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바닷가 해변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쐬고 모래밭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복잡한 것들 모두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작가는 이번 신작을 쓸 무렵에 세상의 온갖 이야기가 다 싫었다고 한다. 오해와 착각과 환상과 거짓과 허구와 진실의 충돌 사이에서, 타인의 이야기든 나의 이야기든 싫증 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그래서 '가급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정황만 있을 뿐, 별 사건도, 갈등도 없는 그런 소설 말이다.

이린이 가끔 하던 말장난이었다. 내가 어느 날 사라지면 페루로 떠난 줄로 알아, 라고 말했다. 페루엔 왜? 라고 내가 물으면, 모르니?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다, 할 때의 그 사과이지. 삶이란 사과 껍질을 가급적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는 일이야. 그 사과는 페루에만 있는 거야?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 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매우 담백하게 흘러간다.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메인 플롯이 아니고, 어린 주인공과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다소 외설적인 사건도 덤덤하게 지나가버린다. 이야기들이 파도에 휩쓸려 왔다가, 다시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듯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이 작품은 작가가 시간의 무게만큼 더욱 깊어지고, 그만큼 또한 가벼워졌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전경린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던 게 고등학교 때였나.. <염소를 모는 여자> 였으니 어느덧 이십여 년이 가까워온다. 한 작가의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다 보면 살면서 누구나 변하듯, 작품의 분위기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한참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 극중 인물들의 사랑과 열정으로 대표되는 캐릭터와 스토리였다면, 갈수록 그녀의 작품은 단순해지고, 그만큼 깊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문장보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단순한 문장이 더 먹먹해지는 법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진실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상대의 변심은 곁으로 흘러서 지나가게 하고, 거부는 가만히 받아들이고, 비밀은 덮어놓는, 말하자면 문제를 괄호 속에 담아두고, 타자와는 가능한 부딪치지 않고, 세상과는 최소한만 연루되는 그런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변화하고 성장하고 시간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인공 유지는 큰 고모부를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작은 고모가 자신의 생모라는 걸 알게 된다. 그녀가 살아온 작은 세상이 뒤틀리며 산산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생모인 이린은 끝내 유지의 생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처럼 느껴져서 유지는 자신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같다고 느낀다. 하루 아침에 윤유지였다가 손유지가 되는 경험은 그녀에게 지독한 박탈감과 결락 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즈음 그녀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생물선생님인 이사경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사경은 말을 하는데도 침묵이 들리는 것 같은, 침묵의 음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생물 실습실에 인체 모형도가 새로 들어온 날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그 앞에서 옷을 전부 벗고 자신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당황한 이사경은 자신의 몸으로 유지를 가리며 네가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것은 유지가 그즈음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다. 이 사건은 곧 그의 아내와 어머니도 알게 되고,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은 오히려 유지를 손자인 연조의 피아노 교사로 집에 들이게 된다. 유지는 그렇게 노부인의 집을 다니며 피아노를 치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즈음 나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세상의 중력이 내게만은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고 사람들 눈에 내가 보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설마 그럴까, 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현실이었다. 작은 고모의 눈에 내가 보일 때면 흠칫 놀라곤 했다. 나는 집에 들어갈 때나 나갈 때 투명인간인 양 인사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교사들이나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 크고 작은 말썽이 일어나곤 했다. 나는 아무리 놀라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라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한밤중에 내내 아파서 앓다가 아침에 응급실에 실려 갈 때도 결코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유지의 생모인 손이린과 이사경, 그리고 그의 부인 백주희, 유지의 전 연인 오휘와 이사경의 아들 연조에 이르기까지 이들 인물들의 관계는 바닷속에서 부유하는 해초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히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지만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모른 척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분위기랄까. 작품의 시작 즈음에 노부인이 이런 말을 한다. "여자의 진짜 능력이란, 제 남자를 알아보는 거란다." 라고, 그리고 "남자란 세상의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고 계산 없이 인생을 내놓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몽땅 주지. 거기에 제 생명을 쏟는 거다. 그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비밀 논리야." 라고. 그런 여자와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처럼 들판을 떠돌다가 덧없이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고. 이렇게 무섭고도 슬프게 정확한 진리가 있을까. 서로의 짝을 만나지 못한 남자와 여자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은 어쩌면 그 동안의 전경린 작가의 작품들을 일맥상통하는 키워드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의 주인공들에겐 항상 사랑이 세상 전부이니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한 후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매혹을 느낀다. 사랑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라는 걸 동감하니깐. 사랑의 끝은 누군가의 삶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으로 옮겨놓을 수도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니까. 그러니 우리는 정신 반짝 차리고 사랑을 해야 한다. 대신 삶은 바다에서 물결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어떨까.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라는 말처럼,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지나가버린 뒤의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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