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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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후유미의 <시귀>시리즈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미야베 미유키의 찬사 덕분에 알게 된 작품인데, 일본 호러 소설계 전설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무려 5권짜리였지만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흡입력 있는 작품이었다. 그 뒤로 국내에 출간된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전부 읽어 보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품절 상태였던 <십이국기>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공포 소설로 유명한 그녀였기에 판타지 대작은 대체 어떨까 너무 궁금했었는데, 마침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새로 출간된다는 소식에 냉큼 사전 서평 단에 지원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은 십이국기 시리즈의 그 첫 번째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평범한 여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십이국기의 세계로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치밀한 세계관과 흥미로운 캐릭터, 철학적인 성찰이 돋보이는 이야기로 유명한 작품답게 그 서두를 화려하게 열어주고 있다.

 

평범한 여학교에 다니는 요코는 착실한 모범생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학생으로 마치 탈색이라도 한 듯한 튀는 빨간색 머리 색상만 아니라면 그저 무난한, 그러니까 있는 듯 없는 듯 교실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그런 학생이다. 부모님 조차 살짝 염색을 하든, 짧게 확 치든 조금이라도 눈에 덜 띄게 하는 게 어떨까 할 정도로 튀는 머리 색상을 제외하고는, 그저 수수하고 평범한 학생 말이다. 고지식한 부모가 여자라면 청순하고, 순종적이고 온순한 게 제일이라며, 현명하지 않아도 되고 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를 가르쳤고, 요코 또한 줄곧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요코가 방과 후에 교무실로 불려간 날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십 대 후반 정도의 기모노 비슷한 옷을 입고, 길게 기른 금발의 머리카락으로 매우 기묘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찾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추격대가 오고 있어 이곳은 위험하니, 자신과 함께 가자며 그녀를 옥상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요코는 매번 꿈속에서 보던 거대한 새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캄캄한 바다를 건너 자신도 모르는 새에 십이국기의 세계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와 공존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갑자기 나타난 게이키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에 의해 그들이 허해라고 부르는 바다를 건너온 그 나라는 매우 독특하다. 십이국기의 국가 체제에 대해서 설명을 듣다 보면, 개인적 역량이 나라의 운명마저 좌지우지 한다는 설정이 매우 시사적으로 느껴진다. 왕이 바뀌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 만큼 좋은 왕을 얻은 나라는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자신의 편은 없다. 아무도 요코를 돕지 않는다.

여기에 요코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속고 배신당할 것을 생각하면 요마를 검으로 쫓아 버리며 노숙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 이후에 펼쳐지는 요코의 모험은 매우 절망적이다. 그녀로서는 전혀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나라에 던져진데다, 게이키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립심이 강하고 모험을 즐기는 두려움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남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그 누구한테도 미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아왔을 뿐이다. '남과 대립하면서까지 무언가를 고수하기보다 일단 주위에 맞춰 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편이 편했던' 요코였기에 실시간으로 요마에게 쫒기며, 낯선 상황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막막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 모험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계속 배신을 당하며, 이 세계의 자신의 편은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요마는 밤마다 나타나고, 이따금 낮에도 나타나 요코에게 고난을 강요했고, 피로와 굶주림 또한 요쿄를 괴롭혔다.

 

그보다 더욱 요코를 괴롭히는 것은 검이 보여 주는 환영과 푸른 원숭이였다. 검이 보여 주는 환영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둘러싸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딸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다며 울었고, 아빠는 학교에 이상한 남자가 데리러 왔다니 가출한 게 틀림없다며 그런 엄마의 기다림을 나무라고 있었다. 담임은 그녀가 우등생이었고, 친구들과도 별 탈 없이 지냈지만, 누가 봐도 착한 아이였다는 것은 사실 누구한테나 맞추고 있었던 것 아니겠냐며, 누구하고나 원만하게 지내는 대신 누구와도 특별히 친하진 않았다고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들 또한 특별히 싫은 애는 아니었지만 좋은 애도 아니었다고, 늘 적당히 이야기를 맞추는 느낌이었으며 다 함께 나쁜 행동을 할 때 비겁하게 나서지는 않으면서 혼자만 착한 척 했다며 위선자로 기억하기도 했다. 요코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 따위 없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고독한지 깨닫는다.

요코 또한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산다. 자신도 파고들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까 라쿠슌의 말은 원망스럽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요코는 생각했다. 아아, 인간은 결국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니까 배신하는 것이라고. 누구든 남을 위해 살 수는 없으니까.

 

나약하고 평범했던 한 여학생이 점차 주체적으로 변해가는 모험의 플롯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녀가 겪는 외부의 시련만큼이나 내면의 방황과 고독이 그려지기 때문인데, 반드시 살아남아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단계가 굉장히 흡입력이 있다. 초반에 요마에게 공격을 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조차 검을 사용하기 싫다며 공포를 회피하던 그녀가, 이제는 머리도 몸도 한계까지 쓰지 않으면, 그렇게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배신하고 이용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주고자 했던 라쿠슌마저 믿지 않게 되는 상황에 이르면 어쩐지 요코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이해하고픈 마음도 들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 내 편은 없으니, 어수룩하게 믿었다고 배신당할 바에야 그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내가 상대를 믿지 않으면 애초에 상대가 나를 배신할 방도가 없을테니 말이다.

요코가 왜 갑자기 십이국기의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게이키는 왜 하필 그녀를 선택했는지, 왜 요코는 낯선 세계에 와서도 그들과 언어로 소통하는 게 전혀 문제가 없는지, 그녀는 과연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스토리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리뷰를 읽는 당신이 이렇게나 재미나고 매혹적인 스토리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시귀> 시리즈만큼이나 너무도 매력적인 작품이라서, 앞으로 출간될 <십이국기> 시리즈가 정말 기대가 된다.

아직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이 작품으로 시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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