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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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야화에서 천일 하고도 하룻밤 동안 셰헤라자데가 샤리아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는데, 셰헤라자데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그녀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남은 목숨이었던 셰헤라자데의 스토리만큼이나 매혹적인 이야기꾼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났다. 왕에게 저당 잡힌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그녀가 풀어놔야 했던 이야기 보따리만큼이나 완벽하게 재미있고,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작가는 맛깔 나는 한 상 차림으로 차려낸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끔찍할 정도로 낡은 집, 목련 흉가에 '월간 풍문'의 두 기자가 취재를 목적으로 도착한다. '월간 풍문'은 세상에 떠도는 온갖 해괴한 이야기, 귀신, 유령, 흡혈귀, 심령사진, 도시괴담, 연쇄살인마, 돌연변이, 미신 등을 주로 다루는 잡지이다. 그야말로 황당하고 무서운 이야기, 끔찍하면서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잡지라고 할 수 있겠다. 목련 흉가에서는 이름도 나이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밤의 이야기꾼들'이라는 기괴한 비밀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매년 한 번씩, 같은 날 저녁에 멤버가 모이고,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는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되 반드시 자신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목련 흉가에 깃든 귀신들을 몰아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퇴마사 한 명이 자살한 이후로 근처에서 유독 실종 사고가 많다고 하는 장소라..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며 모임이 서서히 시작된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이었고, 사회자인 노인과 이야기를 들려줄 다섯 명이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래는 밤의 이야기꾼들 모임의 선서 이다. 그들은 함께 이 내용을 복창하고 모임을 시작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이야기는 살아 있다. 우리가 곧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 <과부들> 에서는 고집과 오만을 갑옷처럼 두르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괴롭히는 남자 K가 등장한다. K는 자신이 수학강사로 출근하는 학원의 접수창구 경리였던 S와 불륜 관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이 없어 그녀의 집을 찾아가보지만, 역시 찾을 수가 없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가 그에게 할 말이 있다며 부른다. 평소에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일이 잦던 아내가, 어머니에게 듣게된 이야기의 실체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판타지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몰라 하는 공감이 들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 <도플 갱어> 자신의 도플 갱어를 만나게 되고 상대방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성형중독에 빠진 한 여인이 등장한다. 발견하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도플 갱어를 만난 것이 망상인지,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에서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 자체가 정신 질환인지는 글쎄 각자 판단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결말은 매우 오싹하다.

 

"이곳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이야기가 진리이고, 이야기가 곧 생명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절도범이건, 희대의 살인마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 스위트 홈>은 언뜻 공포 영화 <숨바꼭질>을 보았을 때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 집에 이사를 가면서 기존 주인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빚더미에 올라서 결국 집을 나가게 됐던 사람이었다. 집을 지켜내지 못한 한 가장의 지독하리만큼 섬뜩한 광기는 영화의 한 장면만큼이나 섬뜩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가 결국 새집에서 벌이게 되는 그 일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만큼 충격의 여파가 크다.

 

네 번째 이야기 <웃는 여자>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웃들에게마저 왕따를 당해, 세상 유일한 친구 피에로와 함께 동물 조립을 하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미친 아빠에 대한 소문 덕분에 학교에서도 늘 외톨이였던 그녀는 학교 친구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그걸 해소하는 걸로 점점 더 동물들을 학대하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왕따가 만들어낸 광기는 생각보다 끔찍하지만 슬프다.

 

"요사스러운 것들은 말이야, 사람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거야. 우리가 무서워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좋아서 날뛰지. 그러니까 지금은 정신 단단히 차리고 살아 돌아갈 궁리만 하자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눈 귀신인지 뭔지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거야. "

 

다섯 번째 이야기 <눈의 여왕> 은 오노 후유미의 <흑사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외지인에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눈의 저주와 맹목적인 미신의 무시무시함.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한 연인, 수와 설의 이야기는 안타깝게 펼쳐진다.

 

이렇게 총 다섯 가지 이야기로 완성된 옴니버스 구성의 이 작품은 '월간 풍문'의 취재 시리즈로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완성도 있고, 흡입력 있는 단편 공포물의 진수를 선사한다.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되는 스토리 전개는 물론이고, 단편이지만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전건우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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