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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양국일.양국명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전나무로 둘러싸인 초록의 숲, 사람들은 그곳을 바람의 숲이라고 부른다. 아주 먼 옛날 나무꾼이 전나무 몇 그루를 베다가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화가 난 숲의 정령이 하얀 여우를 보내 사내의 일가족을 모두 죽이게 한다. 간신히 혼자 목숨을 건진 사내는 복수를 꿈꾸며 산에 올랐지만 가족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허기에 피로까지 겹쳐 숲 한가운데서 쓰러진다. 그때 얼굴이 하얀 여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주고, 정신을 차린 사내는 여인에게 반해 그녀와 함께 살기로 한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지만, 어느 날 그는 여인이 자신의 가족을 몰살한 여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단검 하나조차 들 기력이 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여인은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우는 바람이 만들어낸 환영이고, 사내는 바람에 홀려 숲에서 시간과 기억을 모두 잃어버려, 사람들은 그 숲을 망각의 숲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전나무 숲을 지나 산꼭대기에 자리한 사립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밤 10시 이후에는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게 좋아요. 기숙사 복도를 활보하는 유령들이 있거든요."
학생주임은 여전히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딱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자줏빛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송곳니가 들짐승처럼 날카롭게 보였다. 학생주임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최고치까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번듯함과는 거리가 먼 불량학생 태인은 KM문화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20여 년 전에 세워진 명문 사립 고등학교로 전국에서도 명문대 진학률로는 십 수년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학교라고 한다. 교장을 제외한 모든 교사들이 여교사였고, 각 학년에 두 학급씩, 전교생은 15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으며, 까다로운 교칙들이 많아, 외부의 법과 질서가 통용되지 않은 독특한 학교라고 하겠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맞춤복 같은 스커트 정장을 입고는, 마치 가면처럼 느껴지는 미소를 가지고 있는 학생주임부터,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교장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태인은 그 동안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만은 졸업해야 했기에 우선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태인은 우연히 기숙사 방 천장에 숨겨둔 미지의 노트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오기 전에 실종된 은호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인은 같이 방을 쓰는 지원에 의해 미스터리 소설 연구회 이니그마에서 클럽 활동을 하게 되고, 그들은 악마의 소굴인 학교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클럽이었다. 실종된 은호 역시 이니그마의 회원이었고, 학교에서 마주치는 숱한 수상 함들과 유미라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태인 역시 그들과 뜻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각자 머릿속에서 나름대로의 사실을 만들어가는 거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 만도 해. 이런 곳에서 지내다 보면 가장 발달하는 것 중 하나가 상상력이거든. 이곳은 몸보다 머리를 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몸을 쓸 일은 거의 없어. 움직여보려 해도 금방 한계에 부딪히거든. 결국 학교 안에서만 뱅뱅 돌게 되니까. ..모종의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상상력의 촉수가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거야."
졸업생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두 번씩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정체, 뭔가 반항을 하려고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려는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 주임의 면담 요청, 그리고 면담 이후 갑자기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 은호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상황들은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한 번쯤은 유행했을 것 같은 괴담처럼 어느 학교에나 존재할 법한 무서운 전설은 생각만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공포소설로서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잘 자아낸 것 같다. '악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에서도 '상상했는가? 함부로 상상하지 말지어다'라는 카피에서도 꽤 큰 기대를 했던 탓인지, 아니면 어릴 적부터 공포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단련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공포를 제공하지만, 혹시 우리가 잊고 살던 학창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오싹한 이야기의 세계로 한번 빠져들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