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에게 정말로 악은 가능한 것인가?
이 작품은 나카무라 후미노리가 데뷔 10년을 앞두고 발표한 그의 열한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은밀한 욕망과 숨겨진 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R’이라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은, 의사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는다. "너는 선택을 해야 해.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사는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는 존재가 되느냐."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다들 너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살아가면 어른이 되어서 엄청 힘들어질 거라고. 너무도 어렸던 덕인지 신견은 ‘R’이라는 인격에 침몰당하지 않고, '그럭저럭 평범해 보이는' 어른이 된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사나에라는 여자를 만나 함께 잠자리를 하게 된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었지만 서로 연락처도 묻지 않았고, 그가 다시 찾아가면 더 이상 볼일이 없는 그녀. 하지만 그는 빌린 양복을 핑계로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그날 근처에서 탐정사무실에 근무한다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사나에와 친밀한 관계였던, 지금은 실종 상태인 한 남자를 찾고 있던 중이라며 신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히오키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옥’을 목격한 뒤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히오키 사건은 그가 열두 살 때 벌어졌던 사건으로 당시 범행현장이 밀실 상태여서 미궁 사건으로 불렸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예리한 흉기에 의해 목을 찔렸고, 장남은 심하게 구타를 당한 후 독극물에 의해 사망, 장녀는 당시 수면제를 마시고 자신의 방에서 잠든 상태였다. 현장에 흉기는 없었고, 현광, 창, 모든 곳이 잠겨 있는 상태였다. 당시에 하교 중인 여학생들에게 낯선 남자가 주스 병을 건네는 사건이 빈번했었고, 당시 사나에 역시 그 병을 마시고 잠든 것으로 밝혀진다. 끔찍한 사건 현장에서 혼자만 살아 남은 열두 살 소녀, 과연 지옥을 목격한 뒤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은 어떤 걸까?
사나에 또한 지나치게 아름다운 어머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던 오빠로 인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신견은 살아남은 사나에를 계속 만나면서, 히오키 사건에 대해 탐정과 함께 조사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궁금증에 휩싸여. 혹시 아직도 잡히지 않은 그 범인이 어린 시절 나와 함께했던 ‘R’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사나에는 범인이 십 년 후에 자신을 다시 만나러 온다고 했다 말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근데 십 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아. 무서웠어. 온다면 오는 대로 좋아. 오지 않는 게, 그 유예가, 괜히 더 무서워. 나한테 말했었어.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때는 아름답게 죽여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행복해지는 일 따위, 없었어. 그런데도 오질 않아. 언젠가 틀림없이 올 거면서."
신견은 자신이 어릴 적에 음울한 어린애였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고.
"어느새 나와는 다른 존재가 내 내면에 존재하게 됐어. 어린 나는 그것에 R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아이는 가공의 존재를 만들어내지.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의 내면과 비슷했어..... 히오키 사건은 말이지, 내게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어. 유족인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잘못이겠지만, 어렸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 내 가족에 대해서. 가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파국으로 치닫는 가족의 뒤틀린 사랑으로 인해 상처 받았던 어린 소녀와 ‘R’이라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스스로 사라져버려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어린 소년. 그들은 성인이 되어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는 것만이, 즉 보여지는 것들만이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계는 개인에게 복잡한 미궁과도 같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붙들고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게 사회의 톱니바퀴 안에서 살아야 시시해빠진 존재라도 누군 가에게는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각자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상처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세계가 누구에게나 평등해지면, 누가 죽건 누가 살아가건, 별다를 것 따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은 긴장감 넘치는 추리 소설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철학적인 메세지를 던져준다. 가벼운 두께의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지만, 언제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느껴지는 여운이 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