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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평점 :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헤르만 헤세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여러 편지와 문서를 통해서 그와 인생을 공유했던 세 여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랑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는 세 여인을 사랑했고 그들과 결혼했다. 사진작가였던 마리아 베르누이, 성악가였던 루트 벵거, 미술사학자였던 니논 돌빈이다. 한 인간이 지나온 연애의 궤적을 통해서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매혹적인 일이다. 특히나 그 인물이 헤르만 헤세 처럼 노벨상 수상 작가에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고 말이다. 우리가 어떤 작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서가 전부이다. 하지만 그의 일상에 대한 편린들을 모으다 보면, 실제 그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심리 상태, 환경, 상황 등을 통해 작품을 더욱 깊 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거나 다가설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헤세의 첫 번째 부인이자 세 아들의 어머니. 헤세보다 열살 연상인 마리아 베르누이
헤세는 자기 집에 있을 때조차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나 부인의 다정함조차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 괴벽과 변덕, 두통과 정신적인 열병을 앓고 있던 그에게 가족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그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기 일에만 몰두해, 부인이 곁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다 제멋대로 작별 인사도 없이 갑자기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거나 사라져버린다. 은둔자적 평화를 추구하는 그에게 가족은 창작과 사유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마리아는 13년 넘게 이어져온 헤세의 도피 행각에 지쳐버린다. 헤세가 여행이나 휴양을 위해 집을 떠나 있을 때면, 그녀 혼자서 살림과 육아를 책임져야 했고, 헤세의 신경질적 반응도 그녀가 감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깨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마리아의 정신착란이 원인이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헤세와의 불안정한 결혼 생활 때문에 생긴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헤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스무 살이나 어린 루트 벵거
마리아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헤세가 그와 별거 중이라는 소문이 드릴 때 즈음이었다. 루트는 시인 헤세의 시를 사랑하고 흠모했다. 루트를 만나고 있을 당시에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와의 이혼에 대해 언급한 편지 내용을 보자면, 헤세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나로서는 이혼을 그리 서두를 생각이 없다네. 아내가 3년간 정신병을 앓는다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니까 말일세. 지금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2년만 더 기다리면 되는 거지. (헤세가 안드레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세는 루트가 자신에게 동료 같은 존재, 편하게 야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트는 친구도 동료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 남편이었다. 그녀는 헤세에게 어머니나 누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헤세는 역시 결혼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고 만다. 혼자 어디론가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정신적인 작업에 몰두하며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었다. 결국 2년 뒤 헤세는 루트와도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루트는 법정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서 헤세를 변태적 인간, 노이로제에 걸린 불면증 환자, 정신병자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이들의 관계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망가졌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헤세의 세 번째 부인이자 열 여덟 살 어린 니논 돌빈
니논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흠모해온 남자인 헤세를 만나고 싶어 했다. 니논은 헤세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자 했고, 그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건 헤세의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모두 실패한 역할이었다. 헤세는 니논의 적극적 구애에 거부감과 부담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쉰네 살의 헤세는 이미 두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그에게는 성장한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손녀가 있었고, 열여덟 살이나 어린 유부녀 니논이 그에게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혼은 니논이 오랫동안 꿈꾸어온 이상이었지만, 헤세에게는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체념이었다. 그렇게 루트와 이혼하고 4년 뒤에 그는 세 번째 결혼을 한다.
내 결혼은 여느 결혼하고 다를 바 없다네. 나로서는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네. 오랜 망설임과 저항 끝에 어찌할 수 없는 체념, 아니면 이 여인에 대한 너그러운 양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난 이 여인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녀가 다 늙어빠진 나를 유혹하고, 나의 욕망을 일깨워주고, 나를 타락시켰다네. 그리고 내 집안 살림을 성실하게 꾸려주고,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있다네. (헤세가 쿠빈에게 보낸 편지)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던 헤세이지만, 어쩌면 그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만 사랑했거나, 혹은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던 걸 수도 있고 말이다. 문학적 천재의 매혹에 빠져서인지, 항상 여성들이 먼저 접근하고 구애해서 결국 사랑을 쟁취하지만, 결국은 헤세에게 버림을 받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 컨대 말이다. 길든 짧든 헤세와 각각 인생을 공유했던 세 여인은, 안타깝게도 그와의 사랑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오로지 문학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헤세에게 사랑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이 정도 문학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려면 평범한 삶은 애초에 꿈꾸지 않아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