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지 미스터리하고 매혹적인 제목만큼이나 멋진 표지가 돋보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이다. 비채가 워낙 예쁜 표지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지만, 이번 작품은 더욱 그 빛을 발하는 듯 하다. 일본 원서 표지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쩜 이렇게 제목의 느낌을 잘 살려내면서도 분위기 있는 표지를 만들었는지, 책을 읽기도 전부터 내용이 궁금해질 정도이니 말이다. 몽환화가 실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식물의 총칭인지 그 뜻을 알게 되면, 이 멋진 표지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언젠가 정유정 작가님이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었다. 꾸준하게 죽을 때까지,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일정하게 발표하는 것. 이라고. 한 두 작품 반짝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작품과 작품 사이의 텀이 길게 있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그것도 일정의 수준으로 말이다. 아마도 거의 모든 작가들의 목표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고 생각했었다. 대박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라도 매번 출간할 때마다 그만큼의 화제와 판매량을 가져오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만 큼 국내에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도 드물다고 느껴질 만큼, 엄청난 종류의 작품들이 출간된 작가이다. 나도 거의 출간된 대부분의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거의 언제나 만족감을 준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의 속도감과 몰입 감 또한 여전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속도감과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이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성장하고 달라지는 지에 대한 감동, 스릴 넘치는 트릭과 반전, 모든 퍼즐이 짜맞추어졌을 때의 재미까지.. 취향에 따라 특별히 좋았던 작품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건 정말 별로이다. 이 작품은 좀 수준이 떨어진다. 재미가 없다. 라는 평은 웬만해서는 내릴 수가 없는 작가라는 얘기다. 85년 데뷔 이후 해마다 평균 세 편이상의 작품을 탈고한 다작 작가라는 점에서 보자면, 대단한 수준이 아닐 수가 없다. 특히나 이번 신작은 처음 연재가 끝나고 수 차례 개고를 거쳐, 장장 십 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노란 나팔꽃은 금단의 꽃이라는 이야기야.”

“금단…….”

소타는 리노와 얼굴을 마주했다.

“내가 나팔꽃에 흥미를 가진 것은 아버지의 동생 즉 삼촌의 영향이야. 삼촌이 다양한 변화 나팔꽃을 피우는 것을 곁에서 보다가 나도 흥미가 생겼지. 하지만 삼촌은 어느 날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夢幻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담담한 말투의 다하라의 말에 소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팔꽃에 없는 색상인 노란색. 그러나 에도 시대에는 노란색 나팔꽃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에서 이 작품의 미스터리가 출발했다고 한다. 자연의 이치란 때론 놀라울 정도라서 언젠가 존재했던 것이 현재 사라졌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바로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색다른 역사 미스터리를 완성시켰다. 작품의 서두를 여는 두 가지 프롤로그는 어찌 보면 뜬금없다 싶을 만큼의 강렬함을 준다. 주택가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상사건이 벌어지고, 한 소년의 어린 시절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프롤로그는 결국 전체 이야기의 직조에서 중요한 짜임새를 엮어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리노의 사촌인 나오토의 자살소식으로 시작한다. 상갓집에서 리노는 오랜만에 할아버지인 슈지를 만나 근황을 묻는다.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했던 그녀는 큰 슬럼프 없이 큰 시합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냈고, 전국대회 우승도 놓치지 않았으며, 국제 대회에서도 선전하던 유망주라 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연습 중이었다. 그런데 원인불명의 현기증 때문에 결국 수영을 포기했던 과거가 있다. 할아버지는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리노에게 말하고, 그녀는 그걸 계기로 자주 들러서 슈지가 키우는 꽃의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는 걸 도와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그 어떤 증거도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점점 독거 노인의 외로운 죽음은 미제 사건처럼 되어 가지만, 리노는 할아버지 집에서 없어진 화분을 발견하고는 사건의 진상을 찾아보기로 한다. 소타는 원자력을 전공했지만 2011년 대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세상의 이미지가 너무 나빠서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동기들은 대부분 원자력발전과 관계없는 회사로 취직을 준비하지만, 몇 년씩이나 공부했던 것과 전혀 상관없는 회사에 가려니 허무한 그는 상실감이 크다. 원자력을 미래의 에너지로 생각하고 청춘의 시간을 온전히 바쳤던 그에게 대학원까지 온 것은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집에 내려와있는 그가 우연히 리노를 만나게 된다. 리노는 경찰청 관료인 형 요스케를 찾아왔고, 안 그래도 가족들에 대해 어릴 때부터 의문이 있었던 그는 형의 비밀을 풀어보겠다고 리노와 함께 할아버지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리노와 소타가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굉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어딘가 닮았어요. 열심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그리고 리노와 소타 외에 사건을 추적하는 또 다른 축인 형사 하야세에게도 분명한 동기가 있다. 그는 불륜으로 별거 중인 상태라 아들에게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내내 미안했다. 바로 그런 아들이 슈지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소매치기로 몰려서 경찰서에 갈 판국이었는데, 슈지가 진짜 범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정의를 주장해서 그를 구해준 것이다. 하야세의 아들은 그것을 두고두고 고마워했었고, 사건 소식을 알게 되자마자 아버지에게 꼭 범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하야세 입장에서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꼭 이 사건의 범인을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들 주요 캐릭터의 이런 부분이 극에 몰입하는 힘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추리소설 속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살인이란 것이, 사실 현실에서는 터무니없이 부자연스러운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발한 트릭과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에만 몰두하는 줄거리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는 항상 평범한 인물들이, 각자의 개연성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그래서 멋들어진 문장을 쓰지도,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지만, 독자들에게 최고의 페이지 터너, 즉 속도감을 줄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서스펜스도 스릴도 수수께끼도, 리얼리티가 없으면 실감도 감흥도 일지 않는다'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말처럼, 현실에 밀착하지 않는 추리소설은 독자에게 실감을 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복잡한 트릭과 엄청난 반전 보다는 가족과의 관계와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사회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 이 작품이야말로 히가시노 게이고만이 써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감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대중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작가라 칭송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 <몽환화>는 그 정점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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