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 역시 소설 원작을 읽기 전에 스티브 매퀸 감독의 영화를 먼저 보았다. 인상적인 장면이 꽤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여운이 남았던 장면은 솔로몬이 만난 여러 주인 중에 온정적인 주인이었던 포드의 아래에 있었을 때의 한 씬 이었다. 자신을 무시하고 농장주의 환심을 샀다고 분노하는 백인 감독이 플랫에게 시비를 걸다 그에게 두들겨 맞자, 동료들을 데려와 그를 나무에 목 매달아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다. 다행히 감독보다 윗사람인 감독관이 재산보호 차원에서 그를 막아 목숨은 건지게 되지만, 농장주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그대로 나무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 장면은 꽤 긴 롱 테이크로 이어지는데, 솔로몬은 다리가 간신히 발끝만 땅에 닿은 채 목이 매달려 버둥거린다.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그 불편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애처롭게 그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동안 다른 노예들은 일상의 일과를 그대로 이어가고, 그의 등 뒤로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어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한 농장주의 호의를 받으며 잠시나마 자유인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솔로몬의 의지가 완전히 꺽어버리는 장면이기도 하고, 한 쪽에서는 이렇게 끔찍한 노예제도가 자행되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너무도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나는 한낮의 태양 아래 서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낡이 밝기 훨씬 전부터 빵 한 조각도 먹은 게 없었다. 통증으로, 또 갈증으로, 또 배고픔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그날처럼 태양이 하늘에서 그렇게 느리게 움직인 적이 없었고, 그날처럼 태양이 그렇게 뜨겁고 사나운 햇살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혼미한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을 했는지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긴긴 하루 동안, 자기 주인 밑에서 먹고, 입고, 채찍질당하거나 보호받는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로운 흑인들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만 말해 두겠다.

 

이 작품은 자유로운 뉴욕 시민이자 바이올리스트였던 솔로몬 노섭이 워싱턴 시에서 1841년 납치되어 루이지애나의 레드 강 근처 한 목화 농장에서 1853년 구출되기까지의 12년 동안의 일을 담고 있다. 단순히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예의 수난만 다룬 게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의 단면들을 보여 주는 풍부한 소재와 묘사들이 넘쳐 소설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게다가 최근에 국내에서도 비슷한 뉴스가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다. 지난 2월 전남 신안군에 있는 외딴 섬에서 현대판 노예인 일명 '섬 노예' 2명이 구출되는 일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지적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다는데,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심했었다. 지적 장애인인 채 모씨는 10여 년을 넘게 공사판에서 일일 노동자로 일을 하고 노숙생활을 하다가 직업소개소 고씨의 꾀임에 넘어가 신안 염전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염전 주인인 홍씨는 5년을 넘게 그에게 월급은 한 푼도 주지 않은 채 쇠파이프로 구타하기도 하는 등 매일매일 노예처럼 부렸다고 한다. 다른 한명인 김모씨는 카드 빚 때문에 노숙생활을 하던 중 역시 고씨의 꾀임에 넘어가 섬으로 왔고, 그들은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히 실패했다고 한다. 19세기 초의 노예제도가 비단 옛날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21세기에도 버젓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뉴스를 보면서 더욱 솔로몬 노섭이 겪었던 경험들이 생생하게 다가와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불행한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지상의 슬픔이 끝나려 할 때 죽음에 대한 명상-지치고 힘든 몸을 위한 안식처로서의 무덤에 대한 명상-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자꾸 거기에 빠지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그런 명상은 위기의 순간에는 사라진다. 죽을힘을 다하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대왕>앞에서 두려움 없이 버틸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생명은 소중하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도 생명을 위해 싸운다. 그 순간 나에게, 노예가 되어 학대 받는 나에게 생명은 소중했다.

 

자유인 솔로몬과 노예 플랫이라는 두 사람의 삶을 살았던 한 흑인 남자의 마치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그렇게 '실화'라는 임팩트 만큼이나 문학적인 가치를 남겨준다. 솔로몬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두 명의 백인에게 속아 워싱턴으로 갔다 납치되어 노예상에게 팔린다. 그리고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12년간 노예라는 굴레가 씌어진 채 살게 된다. 물론 악덕 백인 주인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온화하고 인정 많은 포드 주인 밑에서도 있었으나, 결국 그도 솔로몬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그 역시 독자인 우리처럼 무기력한 역사 속의 방관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노예 주인들이 모두 악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선한 사람도 노예제 아래에서 무책임한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고, 악한 사람이라고 종교적 혹은 도적적 감화에 따라 선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 플랫을 비롯한 흑인노예들의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만,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고, 소설을 읽으면서도 역시 등장인물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그들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는 방관자의 느낌이 크게 들어 더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그가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천신만고 끝에 플랫이 솔로몬 노섭의 이름과 신분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고통을 탈출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것으로 그저 해피 엔딩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노예상인들을 법정에 고소했지만, 그들은 솔로몬이 자유인 신분임을 몰랐다고 변명함으로써 무혐의로 풀려난다. 이후 솔로몬은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 강연과 연설을 하던 중 행방 불명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사망 연도나 원인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은, 한 사람의 드라마틱한 삶과 탈출 서사가 아니라, 끝없는 고통을 견디며 노예로 살았던 이들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무능, 방관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아닐까 싶다. 과연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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