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불량배를 만났다. 친절하게도 불량배는 선택의 기회를 준다. 돈 줄래, 죽을래?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가 아니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주어진 선택의 기회. 경험적으로 볼 때,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당연하게 우리는 더 나쁜 것을 피해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니까. 어떤 건 쉽고 어떤 건 조금 어렵다는 차이일 뿐,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선택들이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며 앞을 가로막고, 우리는 재빨리 선택하고는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런데 C를 선택하고 싶은데 선택지는 오로지 A와 B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회피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가보겠는가?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바예호 씨를 치료할 생각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둘 중 더 깡마른 사내가 조금은 슬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도주 잔을 사이에 두고 그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붉은 뱀장어 같은 혀를 천천히 움직여 이를 훑더니, 가식적으로 와인을 홀짝이는 척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나를 쫓아왔던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팽 선생이 처한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어느 날 레노 부인에게서 자신의 친구 남편을 좀 만나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는 바예호라는 시인으로 멈추지 않는 딸국질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데, 의사들도 그를 위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당신이 내 친구 남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레노 부인의 말 때문에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최근에 남편이 죽은 그녀에게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며칠 뒤 시인을 만나러 가지만, 어쩐 일인지 의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를 위협하는 느낌마저 든다. 바예호를 만나고 오고 나자, 낯선 스페인 남자 두 명이 그를 쫓기 시작한다. 그들은 팽 선생에게 2천 프랑이라는 거금을 주면서 치료를 그만두라고 협박(?)을 한다. 그는 얼결에 뇌물을 받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벽에 부딪히고, 무슨 이유에선지 치료를 막으려는 이들은 일종의 악이다. 최면요법가인 팽 선생은 점점 더 바예호의 치료에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자꾸만 악몽을 꾸게 된다. 그리고 점차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 볼라뇨 식 미스터리는 우리를 점점 더 극 속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이 몽환적인 작품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실존했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바예호는 물론이고 그의 부인 조르제트 바예호, 팽 선생이 가르침을 받은 최면학자 메스머, 심령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했던 바라뒤크, 그리고 아라공, 다르송발, 이렌느 졸리오퀴리 등 실존 인물과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시인 바예호는 실제로 파리에서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 초라하게 죽었으며 스페인의 전체주의에 대항했던 행동파 시인이었다. 악에 맞서 보려고 했으나 힘없이 죽어가는 시인 바예호와 그런 그의 딸꾹질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결국 병의 원인도,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도 알 수 없었던 팽 선생은 모습과 그를 괴롭히는 정체 모를 스페인 남자 두 명의 대립은 극의 끝까지 불안감과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바예호가 그 병원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시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전체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이 미스터리 한 퍼즐은 혼란스럽지만, 매우 매혹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암울하고도 뒤숭숭한 파리를 배경으로 악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무기력한 인물들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 작품의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미로 자체가 흥미로웠다.
나는 손가락으로 창틀을 따라 더듬어 봤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창문엔 잠금 장치도 없었고, 그렇다고 위나 아래로 여는 것도 아니었다.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분명 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위치를 찾았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빛으로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분명한 나의 〈존재〉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보잘것없긴 했지만 확실한 관객으로서 말이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최면의 계시>에서 한 대목이 소개되어 있다. 포의 단편에서는 최면술사가 최면에 걸린 환자와 나누는 대화를 서술하기 때문에, 이 한 대목은 <팽 선생>의 전체 줄거리를 암시적으로 제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볼라뇨라는 최면술사가 독자인 우리에게 건네는 일종의 최면술 같은 작품이다. 그의 세계에 입문한다면, 우리는 최면을 통해서 꿈과 현실이 뒤섞여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볼라뇨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야만스러운 탐정들>부터 였다. 꽤 두툼한 분량의 두 권짜리 그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사실 제목 때문이었는데, 추리, 스릴러 물을 온갖 종류별로 다 읽어대던 나에게 뭔가 독특하고 새로운 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내가 애초에 예상했던 바대로 흘러가는 작품이 전.혀 아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뒤로 볼라뇨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독특하고, 미스터리하고, 몽환적이고도, 철학적인 이 작가에게 매혹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분량과 상관없이 읽는데 시간이 꽤 소요되긴 했다. 아무래도 기존의 기승전결이 분명한 작법에 너무도 익숙해서 였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라뇨의 작품들은 나를 궁금하게 만든다. 얼마 전에 벼르고 벼르던 그의 유작 장편소설 <2666 세트>를 구입했는데, 시간이 없어 아직 읽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책장에 넣어두기만 해도 설레 일 정도니 말이다. 문학이 사라진 시대의 풍경을 이야기했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는 이런 말을 했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라고. 어쩌면 볼라뇨의 문학은 제일 마지막에 해당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