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와 마지막 작품집인 <디어 라이프>에 이어 세 번째 소설집 <런어웨이>를 읽었다. 이 작품집은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던 <떠남>을 새롭게 번역하여 출간한 책으로 기존 번역서에는 없는 '허물', '반전', ''이 추가 수록 되어 있다.  앨리스 먼로 단편의 특징이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간의 사물들, 나와 가장 가까운 세계에 대해 이보다 더 꼼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밀한 그림 같은 묘사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주변 상황에서부터 마치 카메라처럼 정교한 묘사를 통해서 점점 더 그 인물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라, 장편만큼이나 묵직한 감동을 준다. 예전에 김연수 작가가 장편은 일상의 삶에 가깝고, 단편은 일종의 여행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될 거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빵집 아들이었는데, 그것에 비유를 하자면 일년 내내 손님이 없다가 크리스마스 시즌 때에만 손님들이 북적 이는 빵집이 있다. 장편이라면 평범한 날들 속에 매일 손님이 없는 걸 계속 보여주어서, 클라이막스 인 크리스마스 때 감동을 주는 것이고, 그에 반해 단편은 절정인 크리스마스의 풍경만 딱 때어서 얼마나 흥겨웠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단편에서는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더 많고, 생략을 통해 상징화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장면의 선택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길이는 짧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은 이야기들이라서, 첫 번째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그 맛이 더 향기로운 것 같다.

 

수록된 첫 번째 작품 '런어웨이'부터 마음을 쿡쿡 찌르는 묘사가 돋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들 말이다. <실비아는 물기를 머금은 햇살이 얼굴을 내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비아는 이 웃음이 콸콸 흐르는 시냇물처럼 온몸으로 쫙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비아는 그 키스를 폐경기에 나타난다는 열감처럼 그녀의 내면에서 어마어마한 열을 내뿜으며 꽃잎을 활짝 피운 눈부신 한 송이 꽃으로 여겼다> 는 대목들 말이다. '런어웨이'는 남편의 정서적 학대와 삶에 찌들어 도피를 꿈꾸는 칼라라는 여성과 그녀가 실비아라는 여성과 교류하는 감정에 대한 스토리이다. 단순히 인물의 사소한 행동으로 지나갈 수도 있는 대목들이, 저런 빛나는 묘사로 인해 그 순간,   찰나의 인물이 되어 볼 수 있는 감정이입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웃음이 시냇물처럼 온몸으로 퍼진다.라니. 어쩜 이렇게 절묘한 표현을.. 이라며 감탄하면서 읽었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들은 생생하고, 아름답게 가슴으로, 머리로, 귀로 삶을 체감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작품은 '반전'이었는데,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고 나온 극장 앞에서 친절을 베푼 한 남자에게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신기루처럼 작은 꿈을 꾸었던 로빈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혼자 연극을 보러 다니길 즐겼는데, 그 이유는 비루하고 평범한 자신의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면 그녀는 시내까지 걸어가 강을 따라 걷다가 너무 비싸지 않은 식당이 나오면(대개는 샌드위치 집이었다), 카운터 자리의 높은 의자에 앉아 혼자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면 집으로 가는 7 40분 기차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 몇 시간으로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려는 보잘 것 없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 그런 인생, 모든 것 뒤에는 기차 창 밖을 통해 보이는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는 광채가 있었다. 여름 들판을 비추는 햇빛과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극의 여운 같았다.        - '반전'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극장에서 가방을 잃어버리고 만다. 집에 갈 티켓도, 돈도 한 푼 없던 그녀에게 나타나 따뜻한 저녁을 제공해주고, 선뜻 차비까지 빌려주는 한 남자. 돈을 갚고 싶다는 그녀에게, 그는 일년 후 같은 날 같은 옷 차림으로 자신의 가게에 와 달라고 말한다. 그때 다시 만나서 그 동안 있었던 일도 들려주고 했으면 한다고.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 날은 그녀에게 새겨지고, 일년 후 세탁소에 맡긴 그날의 초록색 드레스를 찾지 못해, 비슷한 다른 옷을 서둘러 구해 입고 간 그녀는, 그러나 결국 그와 재회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되돌아서 오고 만다. 일년 내내 기다렸던 시간이었는데, 기다리는 것이 아까워 결국 그날의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나왔건만 말이다. 왜 그날 그와 그녀의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먼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여기엔 일종의 깜짝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는데, 글쎄, 세상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은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진실을 알게 된 그녀가 "조금만 뒤늦게 갔더라면. 아니,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연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연극을 아예 보지 않았더라면. 머리 따위 매만지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하는 순간에 이르자, 어쩐지 씁쓸해졌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나. 매 순간 후회와 회한이 남아 반성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게다가 어쩐지 행복한 일은 차곡차곡 계단을 밟아야 겨우 생기는데, 불행한 일은 <하루 만에, 단 몇 분 만에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로빈이 가졌던 마음이 무모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그날, 그 순간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다른 세상의 일이었던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번 작품집에는 모든 이야기가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편이지만 줄리엣이라는 공통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세 편도 그렇다. 줄리엣은 기차에서 우연히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우연), 그의 아이를 안고 친정에 방문하고(머지않아), 그가 죽고, 애지중지 기른 딸과 연락이 두절되면서(침묵), 그렇게 이어지는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리파레오스. 예쁜 볼. 이제 생각난다. 그녀가 기억의 바다에서 낚아 올린 호메로스의 단어가 낚싯바늘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러자 별안간 모든 그리스어 단어들이 떠오른다. 6개월 동안 벽장에 꽁꽁 처박아두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한 기분이다. 그 동안 그리스어를 가르치지 않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 '우연' 중에서

 

 

한때는 보물 1호였던 것도 일상에 치이다 보면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이다. 당시에는 잊어버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삶이란 언제나 그런 식이다. <벽장에 처박아두었다가 때때로 다른 것을 찾으려고 뒤지다 보면 기억이 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문득 떠올린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한때 별처럼 빛나던 한 때를, 아 내가 이런 시절도 있었지. 라고 자조하면서. 살아 가다 보면 내 인생의 앞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일도, 기쁨에 겨워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벅찬 일도, 모두 지나간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연'에서 이어지는 스토리인 '침묵'에서는 에릭이 죽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던 줄리엣이 어느 날 문득, 그의 부재를 온몸으로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스 먼로는 그 순간, 그녀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놓았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상에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은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이런 것이 애도로구나. 시멘트 한 포대가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 버스에 오르고, 버스에서 내리고, 집까지(대체 왜 여기서 살고 있는 거지?) 반 블록을 걸어가는 일이 마치 절벽을 오르는 것만 같다>라고. 이토록 문장을 보자마자 와 닿는 묘사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리 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은 죄책감과 후회조차 삶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으로 보인다. '반전'에서 로빈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에 바로 이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과 '우연'에서 하필이면 줄리엣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누군가에게 퇴짜를 놓은 날 그가 기차에서 몸을 던지는 잔인한 상황, 바로 그런 것들이 삶의 유일한 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읽고 나면 언제나 지나간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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